1580년(선조 13년)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부임해 근무할 때 그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려고 만호진 객사 앞의 오동나무를 요구하자 관물이라며 내어주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순신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걱정`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옳은 것에 집착하며 타인에게 잘못을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진정한 완벽주의자다. 세부사항까지 통제하고자 하며 앞 일을 내다보려는 욕구가 있다.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므로 완벽해지려고 한다. 분노를 억누르며 점잖고 예의바르다.

1545년(인종 1년)에 태어난 이순신은 5대조인 이변이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 등의 신진사림과 뜻을 같이했을 정도로 사대부 가문의 후예였다. 이러한 그가 무장이 되려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다만 상당한 학문적 소양을 쌓았으나 자신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관념과 정쟁에 매몰된 당시 문반들의 행태에 식상한 탓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32세로 뒤늦게 무과에 급제하여 백두산 인근의 동구비보에서 초급 군관으로 근무를 마친 그가 1579년(선조 12년) 훈련원 봉사로 영전되어 근무할 당시, 인사권을 쥐고 있는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의 지인을 승진시키려고 서류를 꾸며 올리라고 명하자 거절하고 논쟁을 벌였다. "윤휴는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에서 `서익은 본디 기가 세서 동료들이 그의 뜻을 감히 거스르지 못했는데… 여러 아전들은 관원이 감히 본조(병조)에 대항하다니, 그는 유독 앞길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덕일, 2007)

이순신은 1번 유형답게 옳음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는 가차없는 지적과 함께 시정을 요구했다. 정유재란 이후 그를 제거하려는 일본의 간계에 넘어간 조정이 그에게 무리한 출전을 요구하고, 명령을 거부한 끝에 파직과 모진 고문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것은 그의 평소 태도와 무관치 않았다.

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에 있은 노량해전에 임박하여 일본군은 명나라 지원군 장수에게 뇌물을 쓰면서까지 조선으로부터 안전한 철군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러한 의도는 실제 이순신에게도 전달되었으나 1번 유형인 그에게는 수용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명나라의 장수 진린이 화친을 목적으로 황제가 하사한 장검을 거론하며 협박하자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 원수는 결코 놓아 보낼 수 없소… 한 번 죽는 것은 아까워할 것이 없소. 대장인 나는 결코 적을 놓아두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 (이덕일, 2007)

1번 유형의 격정인 분노는 이순신에게 원칙과 옳음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 여기에 어떠한 타협도 끼어들 수 없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일생 동안 지속되어 순간순간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였다. 그가 여러 번의 위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다면 조선이 어떠한 상황으로 내몰렸을지 짐작이 가능하므로 노량해전까지 그가 건재했던 것은 조선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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