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봄이면 논으로 나섰다. 질퍽한 논에 맨발로 들어가 한나절 허리를 굽혔다. 복숭아 뼈 위로 진흙이 묻은 할아버지의 발목이 기억에 남는다. 우렁이가 살았고 이름 모를 벌레들이 뛰어다녔다. 밤이면 개구리가 울부짖었다. 할아버지는 애써 농약을 치지 않았다. 자식들이 먹을 곡식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수확이 덜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그 곳은 사라졌지만 할아버지는 논을 그리워했다. 적적할 때면 그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근래 몇 년을 돌아보면 귀농이 인기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대 사회의 초침에 지친 직장인들은 제 2의 인생 초점을 귀농에 맞추고 있다. 농촌에서 며칠을 살아가는 TV프로그램들이 봇물처럼 생겨난 이유도 한몫 한다. 농부의 삶에서 여유로운 인생을 꿈꾼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사진작가 강수희,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기술전문저술가인 패트릭 라이든. 늘 경쟁하며 쫓기듯 살았던 이들은 한국의 한 농촌에서 `자연농`을 접한 뒤 새로운 삶에 대한 실마리로 삼는다. 도시의 삶에 대해 회의와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주말 텃밭과 상태 예술을 취미로 삼았던 이들은 우연히 만나 서로의 고민을 나눈다. 자연의 본래 힘을 믿고 인위적인 방법을 자제하는 자연농은 그저 농사법이라는 실용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서 다가온다. 이들은 농부들이 즐겁고 다부지게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자연농 이야기를 나누고자 다큐 작업을 시작한다.

책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는 2011년부터 4년 동안 한국, 미국, 일본의 자연농 농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자연농 Final Straw(파이널 스트로)`를 책으로 엮었다. 책에 소개되는 11명의 자연농 농부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다. 일본 자연농의 큰 스승 가와구치 요시카즈를 비롯해 논밭의 풀과 인사를 나누는 농부 홍려석, 자연농 농산물을 이용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데니스 리 등 자연농 농부들의 깊은 철학에서부터 먹고 사는 현실적 문제까지 내밀한 이야기를 담았다.

소개된 11명의 농부들은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관행농업방식으로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들이 더 이상 지구에서 살아가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국내에서 `지구학교`를 운영 중인 농부 최성현씨는 농약으로 벌레나 잡초와 싸우는 현대농업의 문제를 지적한다. 자연농 농부들은 과도한 비료와 농약으로 유지되는 괴로운 농사에 "나와 자연이 다르지 않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연농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한다.

자연농은 현대 생활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또는 잃어버린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맞게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가는 활동이기도 하다. 두 저자를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답과 삶을 찾기 위해 자연농 논밭으로 향하는 이유다.김대욱 기자

강수희, 패트릭 라이든 지음·320쪽·1만7000원·열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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