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우가 농부의 닭을 물어갔다. 농부는 `오죽 배가 고팠으면 그럴까`라며 참았다. 다음날 여우가 오리를 또 물어갔지만 한 번 더 참았다. 그런데 다음날 또 여우가 나타나자 참다 못한 농부는 덫을 놓아 잡았다. 그냥 죽이려니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 여우 꼬리에 짚을 묶어 불을 붙였다. 여우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이리저리 날뛰자 농부는 일순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여우가 뛰어간 곳은 농부가 일년 내내 땀 흘려 농사를 지은 밀밭이었고, 여우가 뛸 때마다 불길이 번져 밀밭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군이 없다." 사상 최장 기간의 추석 연휴에도 국감 준비에 여념이 없던 공무원들의 푸념이다. 그리고 그들은 최악의 국감을 예견했다. 새 정부 첫 국감을 앞두고 여야 의원들로부터 제출을 요구받은 자료 목록을 보고서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방대한 양의 자료를 요구받았지만, 여야의 결은 분명히 달랐다. 집권여당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기간에 더해 이명박 정부의 정책 및 통계에 집착했다. 반면 야당은 문재인 정부 들어 새롭게 추진된 국정에 포커스를 맞췄다.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당시의 자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 9년간의 보수정권에서 자행된 적폐를 청산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공언한 여당에 맞서 야당은 문재인 정부의 `신(新)적폐"를 저지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심지어 10년이 지난 진보정권까지 문제 삼겠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지나간 유행가 가사처럼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은 이번 국감 중간평가에서 9년 만의 정권교체 후 여야 공수가 바뀐 첫 국감이었지만 2008년 10년 만에 보수 정권으로 바뀐 뒤 국감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판박이`라고 규정했다. 심지어 이번 국감의 평점을 낙제점인 `C-`로 매겼는데, 이는 박근혜 정부 첫 해인 2013년도 국감 평점 `C`보다 낮은 수준이다. 모니터단은 "여야의 정권교체로서 국정감사 목적이 과거정부에 치중돼 정쟁이 일어났다. 국정감사를 심도 있게 할 수 있는 기본 여건이 되지 못해 시작부터 대부분 형식적인 꼼수 국감"이라고 총평했다. 이어 "2008년에는 여당이 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 측근 비리와 정책 난맥상을 점검한다고 했고 민주당은 이명박정부 출범 7개월의 실정과 친인척 비리 문제를 조명한다고 했었다. 올해 국감에서는 여당은 과거 정부의 적폐청산, 야당은 새 정부의 무능심판을 내세웠다"고 비교했다.

굳이 모니터단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소문난 잔치 먹을 게 없었다. 심지어 여야는 제각각 적폐로 규정한 과거 정부 정책을 파헤치는데 집중했지만, 이마저도 요란한 빈 수레에 그쳤을 뿐이다. 여야를 떠나 모든 위원들이 국감 보도자료에 `적폐`와 `신적폐`를 언급하고, 심지어 `조폐공사`를 `적폐공사`라 칭했지만, 콘텐츠는 없었고, 국감장에서 이목을 끌지도 못했다. 가장 첨예한 공방이 펼쳐질 것으로 손꼽혔던 기획재정부와 공정거래위원회 국감에서도 감사위원들의 맹물 공격에 피감기관 수장들의 여유있는 방어로 대처하는 모습이 수시로 연출될 정도였다.

증인 채택과 자료제출을 둘러싼 논란과 피감기관과 감사위원간 막말 등 고질적인 병폐 역시 여전했다. 말 그대로 적폐청산만 부르짖었을 뿐, 환부를 찾거나 도려내지 못한 적폐 국감 그 자체였다.

정치사회학자 아담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를 `불확정성의 제도화`로 요약하면서 정치를 확정적으로 창출하려 할 때, 독재가 탄생한다고 했다. 단정하고 단언하는 사회는 과장과 과시로 병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상호 적폐로 규정하면서 그 적폐를 적폐스런 방법으로 청산하려 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확인된 바다. 하물며 대화와 타협을 통해 민의를 대변하고, 입법화해야 할 국회에선 더더욱 상대를 적폐집단으로 규정해선 안된다. 더욱이 국감은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부조리나 문제점이 없는지 확인하는 자리다. 여기서 여야가 경쟁하듯 적폐논란을 펼치는 것은 의원 스스로가 의회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송충원 서울지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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