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년(중종 14년) 남곤·홍경주 등 훈구파들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궁궐 내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갉아먹게 하는 술수를 써서 기묘사화의 단초가 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走 ·肖` 는 조(趙)자의 파획(破劃)이므로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중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6번이며 별칭은 `충성가`이다. 이들은 두려움을 많이 느끼며 타인에게 의존하고자 한다. 자신을 온화한 사람으로 인식시켜 공격을 유발하지 않으려고 하며 우유부단하다.

1488년(성종 19년) 성종의 2남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난 중종은 1506년 박원종·성희안 등의 반정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반정의 명분은 전 왕조의 폐정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정치를 개혁하기 위하여 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을 강화하였고,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종의 의욕적인 정책은 6번 유형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충성심·의무감과 같은 것으로, 개혁드라이브를 이행함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에 충실함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종반정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치세 초기부터 그가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왕도정치를 앞세워 훈구세력들을 견제하고자 했지만 반정 공신들의 막강한 힘 앞에 성과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1510년(중종 5년) 반정의 주축인 박원종의 사망을 계기로 공신세력이 위축되고 사회적으로도 개혁에 대한 요구가 점증하자, 중종은 1515년 이후부터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중용하여 그들이 표방하는 왕도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혁방법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훈구파의 주축인 반정공신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519년 조광조 등이 시도한 위훈삭제(偉勳削除)로 중종반정 공신 중 작호가 부당한 76명의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권력의 핵심인 공신세력들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어서 그들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조광조 이하 70여 명은 모반을 획책한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였고 이상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점진적이지 않았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기본을 삼지 않고… 간사한 무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율곡전서 동호문답, 인물한국사)

정치개혁의 연출자는 중종이었으므로 자신이 의도한 개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방향성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나 급진적인 조광조 등을 뒤따라가기 급급하다가 염증을 느꼈고, 마침내 훈구파에 동조하고 말았다. 조광조 입장에서는 가장 신뢰하던 지지자에게 배신을 당한 꼴이었다.

그에게는 6번 유형답게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고 신진사림과 훈구파 사이에서 양자의 입지를 살피는 조정 능력이 매우 아쉬웠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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