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호소력이 강해 웅변에 능했으며 1960년도 최초의 대통령후보 TV토론에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당신 정치거물이었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당시의 세계는 미-소 간의 냉전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미국 내에서는 KKK단을 비롯한 백인우월주의에 의한 인종차별이 만연한 때였다. 대통령 취임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Ask not…"으로 시작하는 그의 호소는 여전히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미국인에게는 `뉴프론티어정신`과 세계시민에게는 민주주의·자유수호와 평등을 외침으로써 큰 감명을 줬다. 국내에서는 인종차별문제를 타파하고자 노력했고, 쿠바 핵미사일 위기 때에는 강력한 대응정책을 펴 구소련과 쿠바의 굴복을 받아내는 등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또한 세계평화봉사단을 창설해 세계평화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보여줬다. 지금은 오히려 케네디의 높은 가치관에서 한참 퇴보한 미국우선주의를 부르짖고 있으니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다.
케네디대통령에 대해 또 하나 언급해야 할 점은 당시 구소련에 뒤져 있던 우주개발경쟁에서 큰 획을 긋는 방향을 제시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강력한 추진을 했던 것이다. 이달 초인 10월 4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60년 전인 1957년 그날, 구소련의 뉴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구소련이 쏘아올린 스프트니크 1호(Sputnik 1)가 지구 둘레를 선회하면서 라디오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지름이 겨우 58㎝ 메탈구와 라디오 안테나 4개가 전부인 이것은 우주시대를 열어제친 신호탄이었으며, 이는 냉전시대의 미국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위성은 시속 2만 9000㎞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96분 정도로, 당시 라디오주파수는 20㎒에서 40㎒로 전 세계 무선사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1958년 1월 4일 수명을 다할 때까지 약 7000만㎞를 여행했다. 이는 미국의 NASA를 발족시키는 계기가 됐고, 바야흐로 우주개발 경쟁시대의 서막이었다. 구소련은 몇 년 뒤인 1961년 4월 12일에는 최초로 인간(유리 가가린)을 인공위성(보스토크 1호)에 태워 보냈고 무사히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케네디대통령은 그해 5월 25일, 미국이 10년 이내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킨다는 약속연설을 하게 된다. 우주개발에 대한 미국의 자존심도 걸려 있고, 미사일방어에 우주개발 기술을 접목시키려 했기 때문에 우주기술력의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아폴로 11호 우주선이 1969년 7월 20일 달에 착륙하고 닐 암스트롱이 인류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어 미국은 우주개발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후 미국의 우주개발기술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전을 하게 되는데, 보이저 1·2호를 비롯한 다양한 태양계탐사, 태양관측위성, 허블우주망원경을 비롯한 수많은 우주망원경들, 소행성과 혜성탐사 등 모든 우주개발 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첩보와 국방 분야에도 완전히 이용되고 있는 것은 자명하며, 우주개발기술의 부산물로 우리는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통신, GPS 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한편, 현재 한반도는 북핵위험이 상존하나 미국의 핵우산 방어와 변덕스러운 말과 정책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나라도 천문학과 우주개발 분야에 최우수인력 수천 명이 활동하며 로켓발사체를 비롯한 몇 개의 우주 분야를 주도할 수 있는 시대가 빨리 오기를 갈망해본다.
이영웅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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