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0월 25일 대전일보 13면 보도.
1997년 10월 25일 대전일보 13면 보도.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DJ의 대권에도 빨간불이 커졌다. 이에 당시 DJ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태재단의 상임 고문 이강래는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 김종필(JP)의 자유민주연합과 연합하는 방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 DJ는 이를 수용하고 자민련과 정책공조를 추진한다.

결국 양당은 그해 10월 27일 `대통령 후보 김대중 총재, 국무총리 김종필 총재`를 골자로 한 야권 후보단일화 협상안을 최종 타결했다. DJP 연합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동안 DJ를 괴롭혔던 색깔론 시비를 차단할 수 있었고, 호남 외에는 표의 확장성이 떨어졌던 DJ에게 충청과 수도권 등에서 엄청난 표의 확장을 불러왔다. 결국 그해 대선에서 지난 1992년 대선에서 얻은 804만 표보다 228만 표 많은 1032만 표를 얻으며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자민련과 새정치국민회의는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17석에 그쳐 단독으로 교섭단체 등록을 할 수 없게 되자 새정치국민회의 후신인 새천년민주당은 의원들 꿔주기를 하여 당적을 옮겨주기도 했다. 그뒤 지나친 JP의 장관임명권 행사는 동교동계의 반발을 불러 결국 DJP연합은 파국을 맞게 됐다.

1997년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요청을 한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위기를 인식한 이는 많지 않았다. 정부는 같은 해 12월 3일 구제금융 요청을 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말 언론 지면에서는 외환시장이 흔들린다면서도, 국내경기는 회복국면이고 장기적으로는 안정될 것이라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연쇄적인 외환위기가 초래됐지만, 설마 우리나라까지 닥칠까 하는 안이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결국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가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대량해고와 경기악화로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어 1997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고, 여당은 야당에게 패배해 정권교체가 이뤄줬다. 김달호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1997년 10월 28일 대전일보 1면 보도.
1997년 10월 28일 대전일보 1면 보도.

김달호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