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양당은 그해 10월 27일 `대통령 후보 김대중 총재, 국무총리 김종필 총재`를 골자로 한 야권 후보단일화 협상안을 최종 타결했다. DJP 연합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동안 DJ를 괴롭혔던 색깔론 시비를 차단할 수 있었고, 호남 외에는 표의 확장성이 떨어졌던 DJ에게 충청과 수도권 등에서 엄청난 표의 확장을 불러왔다. 결국 그해 대선에서 지난 1992년 대선에서 얻은 804만 표보다 228만 표 많은 1032만 표를 얻으며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자민련과 새정치국민회의는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17석에 그쳐 단독으로 교섭단체 등록을 할 수 없게 되자 새정치국민회의 후신인 새천년민주당은 의원들 꿔주기를 하여 당적을 옮겨주기도 했다. 그뒤 지나친 JP의 장관임명권 행사는 동교동계의 반발을 불러 결국 DJP연합은 파국을 맞게 됐다.
1997년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요청을 한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위기를 인식한 이는 많지 않았다. 정부는 같은 해 12월 3일 구제금융 요청을 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말 언론 지면에서는 외환시장이 흔들린다면서도, 국내경기는 회복국면이고 장기적으로는 안정될 것이라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연쇄적인 외환위기가 초래됐지만, 설마 우리나라까지 닥칠까 하는 안이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결국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가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대량해고와 경기악화로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어 1997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고, 여당은 야당에게 패배해 정권교체가 이뤄줬다. 김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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