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연휴도 이제 지난 일이 되었다. 도대체 무슨 조화였던가. 돌이켜보면 단군도 세종대왕도 슬며시 도운데다 음력으로 움직이는 추석이 빈틈을 찾아 장단을 맞추었고 정부까지 한 몫 거들어 합작해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오늘은 충남 아산시에 자리한 `외암 민속마을`로 나들이를 해보자. 설화산과 그 앞을 흐르는 시내가 그림처럼 어우러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에다 고풍스런 가옥들과 돌담은 마냥 정답고 편안하다. 조선조 숙종 영조 연간에 이간(李柬)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살았다. 호는 외암(巍巖), 바로 마을 이름이기도 하며 외암이 있었기에 외암 마을은 더욱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18세기 들어 노론 학자들 내부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학문 논쟁이 일어난다. 사람과 동·식물의 본성이 같은가 혹은 다른가를 두고 벌어진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 외암은 사람이나 금수초목(禽獸草木)의 본성이 같다고 하는 견해를 취해 그 중심이 되며 대개 서울 경기도의 학자들이 그의 학설을 따랐기에 낙론(洛論)이라 하였고 그 반대 입장 즉 서로 다르다고 한 주장은 충남 홍성의 한원진(韓元震)이란 인물이 주도하였고 주로 충청도 선비들이 그 설에 동조했다 하여 호론(湖論)이라 불렀다.

외암 마을 안의 `건재고택`이 이간이 태어나고 거주하던 곳. 호락논쟁으로 인해 이 마을은 조선 성리학계의 한 성지가 되어 사방에 그 이름을 드날리게 된다. 사람이나 금수의 본성은 같다고 하였으니 금수와 다름없는 오랑캐 청나라도 인정하고 문물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으로 연결되며 이어 개화사상으로 계승되었으니 낙론의 중심 외암 마을이 주는 의의는 자못 크다.

외암 마을을 둘러보았으면 그 남쪽 지척 강당골의 조그만 절 강당사(講堂寺)를 반드시 들르시라. 원래 관선재라 하여 외암이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 당시 사람들은 흔히 강당(講堂)이라 불렀으며 순조 때에 외암서사(巍巖書社)라는 서원이 된다. 이후 1868년 대원군이 `적폐청산`의 최우선으로 서원을 향해 칼을 빼어드니 곧 `서원철폐령`. 그 칼날을 눈앞에 두고 서원측은 급히 남으로 산을 넘어 공주 마곡사에서 관음 불상을 가져와 모셔놓고 사찰로 위장하여 그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다. 조선시대 유교와 불교의 위상이나 관계를 놓고 볼 때 가히 파격의 극치였다. 관음보살은 결국 이 서원의 훼철을 막아주었고 그리하여 지금도 한 공간 안에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조선조 유일한 기념비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쩌면 사람과 금수의 본성은 같다는 낙론의 본향이었기에 가능했던 발상이 아니었을지.

혹 시간이 난다면 호론의 중심지였던 홍성으로 가 볼 일이다. 한원진은 홍성군 서부면 바닷가의 남당리 출신. 남당(南塘)은 그의 호이자 오랫동안 충청도 양반들이 꼬리를 물고 드나들던 학문의 고장. 요즘은 대하와 새조개의 맛으로도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니 가을 여행길로는 참으로 제격이다.

충청도로 떠나는 유교산책은 그 의미가 무궁무진하며 그 재미도 꽤 쏠쏠하다. 아니 충청도를 빼고는 결코 조선의 성리학을 말할 수 없다. 사람과 금수초목의 본성은 같을까 다를까.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라도 좋으니 한번 곰곰이 비교하며 생각해보자. 행여 웃지만은 마시라. 실상 그런 사색이야말로 우리 옛사람들이 하늘과 사람과 사물의 이치를 따지고 들던 평생의 공부였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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