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악한들`의 첫 자리는 늘 재벌이 차지했다. 현정권이 들어서자, 재벌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어졌고 재벌에 대한 규제는 부쩍 엄격해졌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 정책은 인기가 높다.

묘한 것은 모두 재벌을 믿고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소비자들은 재벌 제품들을 높은 값을 치르고서도 산다. 사람은 누구나 소비자이므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시민들은 재벌을 믿고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종업원들을 잘 대우하니, 재벌의 종업원이 되거나 종업원을 배우자로 얻기를 모두 바란다. 재벌이 빚을 내려 하면, 은행 차입이든 사채 발행이든, 모두 중소기업들보다 싼 이자를 받겠다고 나선다. 해외에서도 사정이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재벌을 혐오하면서도 모두 재벌을 신뢰하고 거기서 일하려 한다는 현상은 기괴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왔는가? 재벌과 다른 기업들을 변별하는 기본적 기준은 크기이니, 재벌에 대한 태도를 평가하려면, 먼저 크기에 대해 살피는 것이 순서다.

생명체든 사회 조직이든 오래 사는 데는 크기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풀이나 곤충은 한 해를 넘기기 어렵지만, 나무는 몇백 년을 거뜬히 살고 짐승은 몇십 년을 산다. 조직도 마찬가지니, 큰 나라는 오래 가지만 작은 나라는 늘 위태롭고, 대기업은 오래 가지만 개인 기업은 몇 해 못 간다.

이처럼 큰 존재들이 오래가는 까닭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크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생명체든 사회 조직이든 구성 요소들의 무작위적 움직임들이 항상성을 위협한다. 생명체는 분자들의 끊임없는 운동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사회 조직은 구성원들의 비행이나 이탈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몸집이 커서 구성 요소들이 많으면, 이런 무작위적 움직임들의 영향이 크게 줄어든다. 외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내부의 항상성을 지키는 데도 크기가 중요하다. 실제로, 급격한 정치적 또는 기술적 변화에 대기업들이 작은 기업들보다 훨씬 잘 대처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생명체나 기업이나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면 자연스럽게 자라난다는 사실이다. 자연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생명체는 개체들이 늘어나 전체 생질량(bio-mass)이 커진다. 시장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기업은 규모가 커진다. 따라서 대기업을 억압하는 것은 환경에 대한 성공적 적응을 벌하는 짓이다. 이치에 맞지 않고 경제에 크게 해로울 수밖에 없다.

기업이 계속 성공하려면, 제품들을 개발하고 품질을 개선해야 한다. 그래서 외주에 맡기던 공정들을 내부에서 하게 되어, 종사하는 분야들은 점점 늘어난다. 즉 성공적 기업은 몸집만이 아니라 사업 범위도 늘어난다.

대기업이 지닌 결정적 이점은 시장에서 나온 좋은 변화들에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큰 성공은 큰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작은 기업들은 그럴 힘이 없다. 지금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누리는 반도체 경기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큰 위험을 지면서 큰 투자를 한 덕분에 좋은 기회가 왔을 때 큰 이익을 보는 것이다.

게다가 대기업의 규제가 대체로 우리 기업들에만 적용되어서, 외국 대기업들은 오히려 우대 받는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드높은 우리 사회에서 이런 역차별이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사실은 야릇하다.

이제 국경이 빠르게 낮아지고 성기어져서,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다. 자연히, 대기업들은 더욱 중요해진다. 나라마마다 암묵적으로 자국 대기업들을 지원한다. 우리 사회만 예외다. 중소기업들만 온실에서 키워서, 중소기업들은 중견기업으로 자라나는 것을 마다하고, 중견기업들은 대기업 지정을 사약처럼 여긴다. 기업에 대한 정책이 이래서야, 어떻게 경제가 발전하고 나라가 커져서 둘레의 강대국들로부터 대접을 받겠는가?

지금 형편에선 대기업들이 늘어나기도 더 자라기도 어렵다. 세계에서 일류 기업 대접을 받는 우리 기업은 삼성전자 하나다. 참으로 걱정스럽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이 열 개만 있다면, 내 통장의 잔고가 달랑달랑 하더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사회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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