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의 패전 소식에 선조는 바로 도주 길에 올랐고, 대신들에게 자신의 의지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요동으로 가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때 좌의정 류성룡이 "안 됩니다.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하고 나섰다(이덕일, 2007).

류성룡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다. 이들은 올바른 삶의 역할 모델이 되고자 하며, 타인에게 잘못을 시정하도록 요구하고 진리의 소유자로서 비판적으로 우월함을 과시하며 분노를 표출한다.

1542년 태어난 그는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익혔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있던 중, 1569년(선조 2년) 한 번에 6계품을 뛰어넘어 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렇게 파격적인 승진이 가능했던 것은 인종의 신위를 모시는 예민한 사안에 대하여 냉철한 논리를 바탕으로 영의정 이준경과 맞서면서 중앙정부의 엘리트 관료로 뛰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초기 다급해진 선조는 류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했다. 5월 1일 파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류성룡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여 신하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요동 내부책에 대한 반대로 눈 밖에 난 류성룡도 곧바로 영의정에서 파직하였다.

1593년 5월에는 나고야성에서 명과 일본 간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줄 것` 등을 골자로 하는 2차 강화회담이 조선을 따돌리고 진행되자 류성룡은 이를 간파하고 강화를 반대하였다.

류성룡은 1593년 공노비와 사노비에 대하여 공을 세우면 면천해 주는 조건으로 부족한 군대를 충원하는 천인충군론(賤人充軍論)을 강력 추진하였고 사노비에 대한 기득권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가 뒤따르기도 했다.

1594년 잡다한 공납(貢納)을 폐지하고 토지 보유를 기준으로 쌀로 납부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시행함에는 기존의 공납제도에 따르는 각종 이권이 차단되는 이유로 양반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각 도의 감사, 고을 수령, 아전들로부터 반발이 뒤따랐다(이덕일, 2007).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도 류성룡은 1번 유형답게 자신의 능력을 차분히 발휘하였는데, 이는 그의 우월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었다. 전쟁 수행은 뒷전이고 겁에 질려서 도주만 생각하는 임금, 노블리스 오블리주는커녕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사대부들, 구심점 부재로 나라의 백성임을 망각한 민초들, 조선을 침탈한 일본이야 그렇다쳐도 지원군으로 출병한 명의 횡포와 기회가 되면 조선을 그들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검은 속셈 등 류성룡에게는 모든 것이 잘못이었고 시정 대상이었다.

그러나 1번 유형인 류성룡은 차분하고 냉정하였다. 온갖 혼돈은 그의 냉철한 사고를 거치면서 정돈된 상태로 돌아왔다. 전란 1년 전에 이순신을 정읍현감직에서 무려 7품계를 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도록 천거한 점은 신의 한 수였고, 류성룡이란 존재는 불행한 조선에게는 그나마 구원의 손길이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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