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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과 함께 반세기…한획 혼·정성 깃들어"

2017-10-09기사 편집 2017-10-09 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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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장암 이곤순 선생 인터뷰

첨부사진1이곤순 선생은 "서예가는 말이 아니라 작품으로 표현하고 작품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며 부단한 자기 성찰과 노력을 역설했다. 사진=신호철 기자
장암(長巖) 이곤순 선생은 전통성과 법에 충실하되 그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지난 50여 년간 선비로서, 서예가로서의 길을 헤쳐온 선생은 오체는 물론 한글체와 국·한문 혼용체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작품을 펼쳐 보여왔다. 법고(法古)에서 창신(創新)을 일궈내 듯 변화의 묘를 반세기의 필력으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선생의 작품에서 새벽달 같되 가을 기운을 떠올리게 하는 맑고 기이함을 엿보게 되는 이유다. 절제된 아름다움에선 굳세고 강한 필력이 감추어져 있다. 작품에 청아한 인품이 숨어 있다는 의미다. 역경에 있는 '후덕재인(厚德載仁)'을 떠올리게 한다고나 할까. 10일부터 15일까지 대전예술가의집 전관에서 열리는 고희전에 앞서 선생을 만났다. 대전 중구 중촌동 소재 보문서실은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의 현장이었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가 넘쳐나는 그곳에서 선생은 자신의 서예 인생을 담담히 돌아봤다. 그러면서도 최근 서예계의 현실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 전시회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데 오랜만의 나들이입니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2008년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벌써 9년이 됐네요. 고희를 맞았어도 그냥 지나가나 했습니다. 두보가 말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처럼 70세까지 산다는 게 옛날이라면 드문 일이었겠죠. 그런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게 있고 주변에서 적극 권유하면서 용기를 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는 시점에 전시를 하니 예술가로선 하나의 모멘텀이라 할 수 있을까요."

-주요 작품을 소개를 해준다면.

"인생을 회고하는 뜻에서 주요 경향들을 정리했습니다. 회갑전 이후 지난 9년 사이에 쓴 작품이 전시작의 4분의 3정도 입니다. 30-40년 전에 썼던 것도 1-2점씩 냈습니다. 약 150점을 전시하고, 서집엔 250여 점의 작품을 담았습니다. 서예전으론 대규모죠. 훈민정음이나 용비어천가 등 세종대왕이 창안해 당시에 썼던 글씨를 현대화 시킨 작품도 선보입니다. 이후 궁중에서 발달한 궁체, 나름대로 행·초서와 융합시켜서 필을 새롭게 구사한 작품, 한문의 각체, 그 중에서도 예서와 행·초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시를 앞두고 장암은 작품들마다 하나씩 일련 번호를 매기고 꼼꼼하게 원문과 역문 등을 정리해 서집에 넣을 작품들을 한아름 모았다. 250여 점에 이르는 작품들을 표구해 크기별로 나누고 정리했다. 작품 하나하나에 혼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서예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충남 대천(현 보령시)에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가학(家學)으로 천자문을 뗐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셨는데 붓으로 매일 하루에 넉 자씩 썼죠. 연필이 아닌 붓으로 써서 붓하고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그렇게 글씨 쓰는 게 취미가 됐어요. 다른 재주가 없어 글씨 쓰는 걸 좋아했는지. (웃음)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예 공부를 독학으로 계속했습니다. 충남대학교 1학년 때 동방연서회에서 주최하는 서예대회에 나가 상을 타게 됐습니다. 그 때 대서예가인 일중 김충현 선생을 만나 사사했고 그게 50년 넘도록 이어졌습니다."

- 일중 선생에게 배운 서예정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선생님은 선대가 한일합방 때 자결을 할 정도로 꼿꼿한 선비 집안입니다. 그 가풍은 글씨를 가르칠 때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선생님은 붓을 잡는 사람은 지사(志士)나 고일(高逸, 풍모·기개·학식이 높은 사람)의 정신으로 서예를 공부를 하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 말씀이 떠오릅니다."

- 한글뿐만 아니라 각체(各體) 골고루 능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작품 세계를 설명해 준다면?

"법고창신(法古創新),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있듯 전통 속에서 창의가 나와야 합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1970-80년대 초의 제 작품 경향은 한글과 예서에서 일중 김충현 선생님의 필의를 이어받아 개성미를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후 광개토대왕비를 즐겨 임서했는데 이는 민족적인 서예 작품을 창작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한글 서예를 연마한 것도 우리의 얼이 담긴 글씨를 표현하고 싶어서였죠. 2000년대 들어 한글 판본 고체와 선비들의 한글 편지 흘림체, 국·한문 혼용체, 한글 궁체를 연구했습니다."

- 서예 인생만 반세기입니다. 서예관이랄까, 철학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평소 생각하는 건 세 가지입니다. 첫 째는 수신성입니다. 신언서판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예술성입니다. 이성·감성적 예술성을 갖춰야 하겠죠. 세 번째는 한문·한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서예는 문자예술이어서 한문을 하면 한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 서예 전통 명맥은 이어오고 있지만 위상은 예전만큼 못합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서예에서 한글을 더 승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한문과 한글을 함께 작품화하는 걸 연구하는 서예가들이 적지 않지만 더 많아져야 합니다. 서예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호응도가 높아질 겁니다. 서예가들이 노력을 더 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 한류로서의 서예, 국제적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 없겠습니까?

"중국이나 일본의 서예가가 숫자적으로는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서예 위상은 중국이나 일본에 못지않습니다. 한국의 작품 수준은 한자문화권에서도 상당합니다. 제가 고문으로 있는 국제서법예술연합회 한국본부는 말레이시아, 중국, 일본,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한자 문화권 7개국과 매년 서예교류전과 학술대회 등을 열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 국가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관심이 줄어든 건 아무래도 아쉽죠. 서예는 학문적 깊이와 행동이 함께 할 때 올곧게 갈 수 있는 분야입니다. 학생들에게 서예를 학교 교육으로 권장한다면 인성교육 효과와 더불어 서예층이 두터워지고 그만큼 국제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 서예가로서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거나 서실에 나와서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붓을 듭니다. 서예 하는 사람은 붓을 놓으면 안됩니다. 붓은 예민해서 칼처럼 금방 녹슬죠. 손도 무뎌지면 안되기 때문에 젊을 때처럼 왕성하게는 못해도 시간 나는 대로 붓을 잡고 작품을 합니다. 사서 같은 경서를 읽는 데도 소홀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 후학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한다면.

"제자들에겐 네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붓을 놓지 말라. 둘째 자신의 직업에 대해 소신을 갖고 꾸준히 밀고 나가라. 셋째 곁눈질하지 말라. 정법으로, 원칙대로 가라는 것이죠. 넷째 서둘지 말라. 세상이 자꾸 변할수록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고 당부합니다. 이는 법고창신, 온고지신과도 일맥 상통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 계획이나 구상을 들려준다면?

"앞 일은 모르죠. 허허. 힘 닿는 데까지 붓 들고 쓰고 싶은 거 쓰려고 합니다. 그게 이제 평소의 생활이 됐으니까." 대담=송신용 대기자 겸 논설위원 정리=강은선







충청권 서예문화 1세대 작가

장암 이곤순 선생은?

충남 보령 출신인 장암 선생은 1960년대 후반부터 대전과 충남지역 서예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충청권 1세대 작가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 서예가다.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의 양송 서예에 서맥의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일중 김충현 선생을 사사해 한국 서예의 적통을 이어왔다. '바위처럼 변하지 말고 한결같이 정진하라'는 뜻의 호(號)인 '장암(長巖)'이 반세기가 넘는 서예 역정을 대변한다.

어려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붓으로 쓰면서 익혔다. 1967년 가업을 잇기 위해 충남대 축산학과에 진학했지만 그 해 동방연서회에서 주최한 학생서예대회에서 수상을 하면서 서예 외길을 걷는다. 1971년 충남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23세의 나이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1998년 대전시문화상을 받았고, 한국미술협회 고문과 일중 김충현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보문연서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1970-80년대 초의 작품 경향은 한글과 예서에서 일중 선생의 필의를 이어받았다. 민족성을 담은 창작 의식이 두드러진다. 1990년대 들어 행서에서 송시열 등의 글씨를 익히고 김구의 초서를 공부했다. 2001년 일월서단전에 출품한 예서 '자강불식'에선 광개토대왕비를 뿌리로 삼고 거기에 석문송(예서체 법첩중의 하나)을 가미한 장암만의 예서체를 선보여 새 장을 열었다. 한글에서 시작된 서예 탐구는 예서를 거쳐 행·초서까지 오면서 비로소 그만의 개성을 담은 '장암체'를 일궈내 일가를 이뤘다는 평가를 듣는다. 강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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