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추석날 고향에 다녀오며 들판 가득찬 벼들을 보았다. 지난여름 퍼올렸던 푸른 절정을 서서히 비우면서. 여름날 폭우와 땡볕을 내려놓고 철들어가는 그 든든한 침묵을 눈여겨보고 왔다. 그곳에서 잠시 나도 더 무겁게 철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냥 벼가 아니었다. 그건 벼들이었다. 그 복수(複數)의 미학. 자기를 비워서 더 큰 우리가 되는 복수의 힘이었다. 너른 들은 서로 어우러져 기댄 벼들로 넘실대고 있었다. 그 넉넉함을 배경으로 원경의 먼 산도 거기에 와서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산의 높이가 비로소 벼들의 넓이와 만나 깊어지는 풍경이었다. 이 세상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우러진 절정의 삼부작.

들녘을 바라보면 모처럼 가슴 벅찬 순간. 그건 너와 내가 크게 하나로 화합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 느낌. 그 흥겨움 더없이 강력히 밀물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들 힘겨웠던 순간도 함께한 일 떠올랐다. 손에 손을 잡고 어둠을 헤쳐 밀고 가던 길. 촛불을 밝히며 밤을 새우던 순간도. 이윽고 해가 떠올라 어두웠던 세상도 밝은 대명천지로 변하지 않았던가. 힘차게 들녘으로 달려가니 노을도 붉게, 붉게 물들며 새로운 시간을 예비하고 있었다. 김완하 시인·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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