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비극 중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기원전 441년경에 쓰여졌다고 추정한다. 잠깐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골육상잔 끝에 결투에서 서로 죽이고 죽게 된다. 크레온은 테바이의 왕인데 다른 나라 군대를 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한다. 안티고네는 오라비의 무덤이라도 만들어주고자 왕의 명을 어기게 되고 동생 이스메네의 회유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설득으로 안티고네에게 간 크레온은 목매달아 죽은 모습을 마주한다. 뒷 마무리는 생략하더라도 안티고네의 이미지가 왜 치명적 아름다움의 소유자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행동에 대한 위험은 불안에 대한 자아의 반응과 조절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불안은 불쾌감이므로 제거되어야만 하고 이때 다양한 정신적 기능들이 활성화 된다. 라캉은 안티고네를 `아름다움의 형상`이라고 했다. 안티고네는 욕망을 정의하는 조준선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매혹적 이미지를 선사한다.

우리를 매혹하는 안티고네의 매력은 두려운 현재를 극복하고자 자기의지에 따라 희생양을 자초하는 진정성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은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킴으로서 그러한 종류의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하는 재현이다(시학). 비단, 비극적 요소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두려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상상적 질서의 기준점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교육도 그래야 한다. 쓰레기를 주우라고 소리치는 선생님 앞에서 아이들의 몸은 굳어버릴 뿐 생각을 확장할 여유가 없다. 아이들은 불안하다. 라캉은 `불안`이 감정이지만 객관화 되어 있다고 했다. 불안 앞에 마주선 아이들은 주관적인 생각이 생성되지 못한다. `아름다움 앞에서 멈추어서게만 해 주는 것` 그것이 부모와 선생님, 모든 교육자들의 몫이다.

아름다움은 그곳으로 곧바로 돌진하게 만들지 않으며 그 앞에서 멈추어서도록 만든다. 곧바로 돌진한다는 것은 주체로의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있다. 문 너머까지 주체와 동행하려 하지 않고 문 바로 앞까지만 동행하는 자세, 비단 교육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와 직업의 역할이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학교폭력의 희생자로, 시험의 압박으로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기사를 접했다. 안타깝고 아프다. 유하정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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