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만나면 개에게 지고

돼지를 만나면 돼지에게 진다

똥을 만나면 똥에게 지고

소금을 만나면 소금에게 진다

낮고 낮아서 더 밟을 데 없을 때까지

세우 젖처럼 녹아서 더 녹을 일 없을 때까지

신을 만나면 신에게 지고

강물을 만나면 강물에게 진다

꽃을 만나면 꽃에게 지고

나비를 만나면 나비에게 진다

닳고 닳아서 무릎뼈 안보일 때까지

먼지처럼 가벼워서 콧바람에 날아갈 때까지

꽃잎 떨어져야 열매 맺듯

이기면 지고 지면 이기는 것

썩은 흙이라야 거름되듯

무조건 진다 지고 또 지고 또 진다

썩고 문드러져서 잘난 척할 일 없을 때까지

끝까지 져서 아무도 못이길 때까지

직관과 역설이 농축된 한 편의 법구경(法句經)이라 할까. 깨달음의 깊이가 맑고 얕은 냇물로 드러난 진리의 말씀이라 할까. 권위와 규율의 엄격한 침묵이 평이하고도 정감 있는 표정으로 드러난 낯빛이다. 불교에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는 화두가 있다. 그것은 우상, 권위,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을 가차 없이 허물고 깨버리라는 명제일 것이다. 불교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것이니. 죽인다는 기표기 진다는 기표로 나타난 것일 뿐.

좋은 시에는 인지적 충격이 있다고 했다. 이 시는 불교의 깨달음과 진리를 표현한 것으로. 무조건 지고 또 지고 또 짐으로써. 썩고 문드러져서 잘난 척할 일이 없을 때까지, 그리고 끝까지 져서 아무도 못이길 때까지 간다는 것이니. 거기에는 그 표현 이상의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이런 선문답은 형식 논리를 뛰어넘기 때문에 일반인은 물론 수행자들도 그 의미를 알기 쉽지 않다. 그래서 선사들은 여기에 다시 시나 노래를 덧붙여 그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니. 이 시의 묘미는 그러한 배경으로 접근할 때에 더 환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김완하 시인·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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