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공화국 시절 이종찬이라는 군인이 있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대통령의 병력 출동 지시에 불응하고 오히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라는 훈령을 내린 일로 평생 `참 군인`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 사람에겐 결혼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북에서 단신 월남하여 의지할 곳 없는 처지에 있던 표자영이라는 여성과 사귀며 결혼을 약속하였으나 그의 모친은 극구 반대하였다. 양 가문의 지체가 걸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간절히 설득해도 다시는 그런 소릴 입에 담지 말라는 호된 질책뿐. 결국 이종찬은 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얘길 하고 말았다. `어머님은 지체 지체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집안은 어떻습니까?`

이종찬의 조부는 조선 말기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 이하영(李夏榮). 경상도 동래 출신. 지지리도 가난하였다. 어려서 통도사 동자승으로 끼니를 때웠으며 찹쌀떡 행상도 하였다. 개항 이후 부산의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있다가 사업을 하러 나가사키로 갔지만 함께 간 동료가 사업 밑천을 몽땅 챙겨 도주. 빈털터리가 된 채 부산행 배를 탔다가 우연히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Allen)을 만난다. 앞길이 막막했던 이하영은 무작정 알렌을 따라 서울로 왔고 알렌은 미국 대사관 소속 무급 의사, 이하영은 그의 요리사가 되었다.

몇 달 후인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난 그날 밤 민씨 외척세력의 수장 민영익이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채 알렌에게 실려 온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알렌은 민영익의 목숨을 살려내고 그 옆에는 내내 이하영이 돕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고종 부부의 총애를 받게 되고 이하영은 알렌에게 서너 달 배운 영어실력 하나로 가파른 출세의 길을 달린다. 1887년 겨울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수행하며 미국으로 간다. 우여곡절 끝에 워싱턴에 도착, 업무를 시작하나 청나라의 강력한 항의와 압력으로 박정양 이하 일행들은 모두 귀국하여 이하영만 남게 되고 그는 곧 미국주재 서리공사로 임명된다. 주미대사가 된 것이다. 나이 서른하나, 나가사키를 떠난 지 4년 후의 일이었다.

다음 해 조선으로 돌아오니 그 후임자는 바로 이완용. 1904년 외무대신에 오르고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하던 서해 어로권을 일본에 넘기더니 급기야 내륙 하천의 항행권마저 넘겨준다. 그 사이 그는 서대문에 99칸 대저택을 가지고 수십 명의 하인을 부리는 장안의 재산가가 되었다. 1905년 8월 21일 아침, 경상도 의성에 산다는 우용택이라는 선비가 이하영을 찾아와 일갈했다. `네가 동래의 천한 몸으로 대신까지 되었으면 나라에 갚음이 있어야지 이제 하천까지 팔아먹느냐. 장차 또 무엇을 팔 테냐?` 그러고는 이하영의 옆구리를 차고 뺨을 후려갈겼다. 그해 11월 을사늑약 때는 법무대신으로 이른바 을사3흉의 1인이 되며 합방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런 이하영의 손자가 이종찬이었다. 외무대신 법무대신의 벼슬에다 대부호였던 사람의 손자가 가문과 자신의 내력을 못내 부끄러워하며 현직 육군참모총장 신분으로 지체가 도무지 걸맞지 않았던 한 여성과의 결혼을 마침내 이루어낸다. 그런 점에서 `참 군인` 이종찬은 `참 남자`이기도 하였다.

집안의 지체를 놓고 벌어지는 전쟁은 특히 결혼시장에선 목하 진행 중이다. 대개 권세나 재산이 그 지체의 척도가 된다.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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