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 칼럼니스트는 `청소년을 위한 진로인문학`(김경집 외, 학교도서관저널)에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각자 초콜릿 상자를 갖고 있음에도, 어른들은 "초콜릿을 아직 먹지 마라, 열심히 공부해라, 좋은 직장을 얻고 돈 많이 벌면 그때 얼마든지 초콜릿을 사 먹을 수 있다"고 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수많은 초콜릿을 다 먹을 수는 없는데, 초콜릿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으면 자신이 어떤 맛을 좋아하고 즐기는지 전혀 모른다며, 그러니 무엇을 즐길 때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놀 수 있을 때 놀아야 나중에 정말 멋지고 행복하게 사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고 3교실은 지난 여름 한바탕 자기소개서 광풍이 지나갔다. 많은 학생이 자기소개서를 잘 쓰고 싶어 하지만, 대다수 학생들의 자기소개서에 `자기` 이야기가 없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이 보여야 하는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과연 학생들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떤 초콜릿을 좋아하는지 탐색할 기회가 얼마나 있었을까. 생명과학 교과서를 아무리 들여다보고 수능특강 문제를 열심히 풀어본다고 해서 제인 구달이 아프리카 대자연에서 만난 영적인 느낌을 함께 느낄 수는 없다.

`랩걸`(호프 자런, 알마)에서 저자는 "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읽을 수 있고, 거의 아무도 말로는 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해서 다섯 사람이 10년 동안 한 연구를 여섯 장의 인쇄물로 정제해 표현할 수 있는 드문 글을 쓰는 데 아주 익숙해졌다"며, "논문에는 잘 자라준 식물들과, 순조롭게 끝난 실험들,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고 나와준 데이터가 담겨있지만 곰팡이와 절망 속에 썩어버린 정원들, 무슨 짓을 해도 안정되지 않던 전기 신호들, 절대 밝힐 수 없는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밤늦게 급하게 확보한 프린터 잉크 이야기에 대해서는 입 다물 수밖에 없다고, 자신이 어떻게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 부으며 과학을 하는지 말할 수 있는 저널은 아직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식물분류학 박사이자 식물 세밀화가인 신혜우의 2014 영국왕립원예협회 최고상 수상작 `참나무 겨우살이 Taxillus yadoriki`가 랩걸의 표지를 장식했다.

`그런 연구를 하면 돈은 어떻게 버느냐?`는 질문을 받는 식물분류학자이자 `그림 그리면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화가, 그것도 장르가 생소한 식물 세밀화가이다. 식물학이 좋아서 공부를 하고, 식물세밀화가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두 가지 일을 하려니 잠을 줄여가면서 한다고 한다.

식물이 갖는 특성을 관찰하며 살아있는 식물을 그리는 과정은 최소 1년 이상 걸린다고 한다. 식물세밀화는 논문을 쓰듯, 신중함을 가지고 기록한 관찰과 측정의 산물이라며, 조금이라도 틀리게 그린다면 후대에 그 식물을 공부하게 될 사람들에게 혼란만 초래하게 될 것이니 학자적인 양심과 집요함 없이 그려진 과학세밀화는 차라리 그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영국왕립원예협회 최고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이 결코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길을, 혼자서 한 발씩 내딛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겠지만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신혜우의 글은 호프 자런과 많이 닮아 있다.

상담을 하며 장래희망이 건물주라는 아이들의 농담에 웃을 수가 없었다. 까다롭고 수고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일을 마다하지 않는 고집과 힘들고 어렵더라도 해내고야마는 열정을 보여주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자소서를 자소설로 만들지 않고, 진짜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삶에서 소중한 가치를 생각해보고 미래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선생님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보문고 과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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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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