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7월 16일 시중 배극렴과 조준, 정도전 등 50여 명의 대소 신료들이 전 왕조의 국새를 들고 이성계의 사저로 찾아와 즉위를 간청하자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교서는 7월 27일에 반포되었는데,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매도해 즉위의 정당성을 설파하고는 "나라 이름을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도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면서 찬탈이 아닌 고려 왕조의 연장임을 강조했다(이덕일, 2010).

이성계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8번이며 별칭은 `도전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욕망(Lust)`과 `공모(Complicity)`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 유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충성스럽고 덜 공격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불의에 관심을 가지며, 사회의 규칙과 관련된 반사회적 요소도 있다. 이들은 자기가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상을 위하여 충성을 바치고 공격성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들은 다른 8유형에 비해 부드럽고 친절하며 화를 덜 낸다.

1360년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이 고려의 관리가 된 지 4년 만에 죽자 그는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부친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상당한 경제력과 사병을 포함한 막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유산이 20대 청년인 이성계에게는 버거운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리더였다. 그는 유산의 무게를 잘 견디고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부친의 그림자를 지우고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무인으로서의 실력과 포용력에 기인했다. 이성계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고려 중앙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우선은 왜구, 여진족, 홍건적 등의 계속된 침입과 이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의 성격유형을 설명하는 `도전자`의 모습이다.

게다가 그는 무장답지 않은 처세에도 능했다. `동각잡기`는 이성계가 부하를 예의로 대접해 아무도 욕하는 자가 없었고, 서로 이성계 부대에 속하고 싶어 했다고 전한다. 또 "태조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남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면서 활을 쏠 때도 상대편의 실력을 봐서 비슷하게 맞히다 권하는 이가 있으면 한 번쯤 더 맞히는데 그쳤다고 기록했다(이덕일, 2010).

이성계의 성격특성의 `공모`는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충성스럽게 보살피고 부드러운 태도로 자신의 주변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의관습에 비추어 파격적인 리더십이었다. 그가 핍박받는 백성들에 대하여 느낀 감정과 이에 대한 정도전의 대안 제시는 자신의 성격특성인 관대함, 포용력과 잘 정렬되었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한 그는 정도전을 너무 믿었고 이방원이라는 변수를 간과했다. 그는 8유형답게 양위 후 태종 8년(14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뜻을 거스른 이방원에게 복수심을 거두지 않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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