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기록하다, 나를'展

부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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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페이지나 되는 책을 한 장 한 장 뜯어내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끝없이 두드려 해체한다. 그야말로 난도질한다. 이 책들을 다시 조심스럽게 붙여 원래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조형설치 상태로 구축한다.

끝없는 육체노동을 통해 해체된 책은 여러 겹 쌓기도 하고 둥글게 말기도 하여 전시장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다. 이렇듯 책을 해체하는 것은 그 속의 글이 사라지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기억도 서서히 해체되어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지현 작가의 `기록하다, 나를` 전시회가 14일부터 11월 15일까지 대전 유성구 도룡동 아트센터쿠에서 열린다.

이지현 작가는 디지털 미디어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책에 주목하고 이들을 해체·융합 하면서 미적 오브제로써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다. 해체된 책은 고유의 문자전달 기능이 상실되면서 그저 흐릿한 이미지를 품고 있는 오브제로 다가올 뿐이다. 가늘고 날카로운 도구로 수백 번 반복된 노동에 의해 해체된 책을 여러 겹 쌓기도 하고 둥글게 말기도 하며 전시장 한쪽 벽을 빼곡히 채우기도 한다.

작가는 성경, 악보, 잡지, 문학, 고전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만 1960-70년대 만들어진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헌책들을 대상으로 한다. 구시대 소통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 책들은 이지현의 손을 거쳐 책 본래의 기능이 해체되는 과정을 통해 `시각예술의 오브제`로 새롭게 태어난다.

작가는 어릴 적 시골 마을 도랑 한 켠 죽은 토끼의 사체가 부패되는 과정에서 충격과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누렇게 변해가는 수많은 책들을 보며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물질로서의 책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작가의 작업인 `해체`와 `책` 으로 귀결된다.

책은 시대성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인류의 사상, 문화, 행동, 경제 등 모든 인간의 지적 활동 기록을 담아낸다. 이지현은 1960-70년대 책들을 선택한 것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그가 인간 사회를 느끼고 세상을 깨달은 시점, 사회와 문화 속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만들게 해준 그 시대의 책들을 선택했다.

이지현은 각각의 낱장을 뜯고 붙이고 쌓고 말아서 책이 가지고 있는 조형성을 끌어낸다. 활자를 읽을 수 없을 만큼 난도질당한 책은 고유 기능을 상실한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책이 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동적 기능에 대한 삭제이지, 오히려 그 문자를 지워버림으로써 책 자체의 소통 기능은 더욱 활성화시킨다.

김용민 설미재미술관 학예연구원은 "이지현 작가의 작업은 변증법적 방법론으로 책의 본질에 대한 아름다움으로의 접근이다. 소통이 멈춰버린 지나간 책은 작가에 의해 다시금 우리와 소통되는 무엇으로 변모된다. 비로소 책들의 꿈이 실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강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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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time-books, 23.5x23x36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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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SE1402 dreaming book 기록하다.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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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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