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흐르는그곳 골목길] ③ 유성5일장, 궁동 로데오거리

1965년 유성시장 모습. 사진=대전중구문화원 제공
1965년 유성시장 모습. 사진=대전중구문화원 제공
허생원이 글러먹었다고 한 여름장은 애시당초 없었다. 시끌벅적하게 흥정하는 소리는 발길을 붙잡고 승강이를 구경하는 재미에 갈길마저 잃는다. 좌판에 점령당한 길에 서서는 무엇이 급할까. 인생이 그렇듯, 앞사람을 뒤따라 가면 그만이다. 츱츱스럽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치않다. 잔치 뒷마당처럼 어수선하게 벌어진 장판은 흥겹기만 하다.

지나갈 때마다 좌판에서 들려오는 호객 소리는 대형마트의 그것과 다르다. 돈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이에게 정을 얻고 싶은 게다. 오일장은 그렇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속 장돌뱅이 허생원의 삶이 시작되는 곳이 봉평 오일장이듯, 오일장은 단순히 물건을 팔고 사는 곳이 아니다. 그 곳엔 삶이 있다.

"아이구, 서운하게 드리겠슈? 내 성격 잘 알잖아. 오늘만 파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좀 깎아줘봐. 고추 열 근은 사야 김장할 거 아녀."

투닥거리는 소리가 대전 유성오일장 골목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김장에 쓸 고추를 사러 온 조경희(71·대전 유성구) 씨는 생각보다 비싼 고추 가격에 선뜻 돈을 내지 못했다. 고추 작황이 예년보다 못한 탓에 한 근(600g)은 얼마 전까지 1만 2000원이던 가격은 25%나 오른 1만 6000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 씨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고추장수를 둘러싼 비닐 포대엔 여름 내내 햇볕에 바싹 말려진 고추가 영롱하면서도 투명한 붉은 빛을 뽐내며 담겨 있었다. 유성오일장에서 20년 넘게 고추를 판 고추장수는 덤을 얹혀주는 거로 흥정을 마쳤다. 조 씨는 그제야 볼록한 지갑에서 1만 원짜리 열 장을 꺼냈다. 그는 "오일장에 와야 신선하고 믿을 만한 물건을 살 수 있다"며 "유성오일장에 있는 상인이나 손님은 모두 수십 년 된 사이"라고 말했다.

닷새마다 한 번씩 시장을 여는 재래 장터인 오일장은 농민·수공업자 등 생산자가 일정한 날짜와 장소에서 서로 물품을 교환하는 농촌의 정기시를 말한다. 유성오일장은 대전 유성구 장대동에서 5일마다 열리는 정기 재래시장으로 1916년 10월 15일 최초로 개장했다. 1970년대 중반 정부가 대도시의 오일장을 폐지한 후에도 유성장은 꾸준히 오일장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원래 매 5일과 10일에 열렸지만 1993년 대전엑스포를 기점으로 매 4일과 9일로 바뀌었다. 장대동 191번지 장옥을 중심으로 장판이 벌어지는 유성오일장은 인근 충남 공주·논산·금산, 충북 옥천 등 인근 시·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직거래장터로 각광받았다. 현재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모인다. 약 5만 2707㎡의 부지에 점포 400여 개가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주변 골목과 공터에까지 장이 들어선다.

장날이면 대전시민들은 물론이고 인근의 충북 옥천, 충남 공주·논산·금산, 세종시 조치원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유성장은 유성구보건소 뒤편의 장터 입구에서 과일류가 거래되고, 그 안쪽으로 어류·채소류·의류·식기류 순으로 좌판이 벌어진다. 유성의 특산물로는 학하 고구마, 세동 상추 등이 자랑거리다. 유성배는 전국에서도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과거 이곳에서는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를 비롯해 무쇠솥을 걸어 놓고 국밥을 파는 국밥집도 볼 수 있었다.

유성장이 인기를 끌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시민들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다가 일반장에서는 보기 힘든 토속 상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보다 귀한 건 상인들이 자식처럼 직접 키운 농산물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봄철이 되면 시골 아낙네들이 길가에 앉아 직접 캐온 쑥이며 냉이·달래·미나리·부추 등의 봄나물이 즐비하고, 여름엔 사과·수박·포도 등 과일이 무궁무진하다. 이른 가을엔 수세미도 만날 수 있다. 앞 사람을 따라 장 골목골목을 돌다 보면 없는 것 빼고 세상 모든 만물을 만날 수 있다. 일반 시장보다 가격이 훨씬 싼 것도 한 요인이다. 현재 유성장날에는 약 400여 명의 상인이 운집하고 있으며, 1만여 명의 시민이 장날에 이곳을 찾고 있다.

올해 개장 100년이 되는 해를 맞은 유성오일장은 한 세기를 견뎌낸 만큼 수많은 이들의 삶을 품고 있다. 대물림해 오일장을 지키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대를 이어 오일장에서 젓갈류를 파는 이동숙(50·대전) 씨는 어머니가 하던 품목과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네 명의 형제와 함께 이 씨는 3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젓갈을 판다. 그의 단골은 모두 수십 년 됐다. 이 씨는 2일이면 충남 금산 오일장에, 5일엔 충북 옥천오일장으로 이동한다. 유성오일장까지 일주일에 세 번 오일장을 찾는다. 그의 물건을 사려는 손님은 그를 따라 오일장을 찾기도 한다. 이 씨는 "어머니가 하던 일을 대물림 받아 하는데, 건물에 들어가 판매하는 것보다 좌판에서 파는 일이 활기차고 즐겁다"며 "손님들과의 거리도 가깝고 무엇보다 싸면서 정이 있지 않냐"고 했다.

건너편에서 표고버섯과 다시마 등을 파는 이효창(65) 씨 역시 20년 된 상인이다. 이 씨는 1000원어치 버섯을 사는 손님에게 덤을 산 양만큼 얹혀준다. "정이니께, 남기면 뭐할겨. 여기 갖고온 건 무조건 다 팔고 주고 하는겨." 그의 말대로 물건이 아닌, 정을 팔고 정을 산다. 쌈다시마를 산 박희옥(58) 씨는 "오일장은 암만해두 정이지. 서로 간에 정이 있으니까 자생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오일장은 닫는 시간이 따로 없다. 해가 떨어지고 어두 컴컴해지면 닫는다.

해가 떨어질 때쯤 발길은 충남대학교 뒷골목으로 향한다.

대전 유성구 궁동. 충남대 정문 옆 쪽문 뒤편에서부터 유성구청에 이르는 이 일대는 젊은이들의 거리로 통한다. 반경 7㎞ 안에 카이스트와 목원대, 침례신학대 등 7개 대학이 몰려 있다. 거리가 번창하면서 붙은 공식명칭은 `대학로`.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를 본땄다. 그러나 이곳 대학생 사이에서는 `로데오거리`로 통한다.

대전시가 1989년 개발한 이후 대학생들의 각종 모임으로 늘 붐비는 곳이다. 건물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는 커피숍, 호프집, 레스토랑 등은 `젊음이의 거리`를 표방하고 있다.

궁동 로데오거리는 돈 없는 대학생들에게 추억과 낭만이 깃든 곳이다. 저렴한 가격에도 푸짐한 양, 오가는 정은 이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93년에 문을 열어 궁동의 터줏대감이 된 `산타클로스`나 궁동감자탕 골목을 탄생시킨 `궁동감자탕` 등 유명세를 탄 식당은 궁동 지킴이로 남아 여전히 빈 주머니의 대학생들을 반긴다.

궁동이 서울 대학로처럼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찾지 않는 가장 큰 문제점은 화랑이나 소극장 등 문화 공간이 전무하고 휴게음식업소 일색라는 점이다. 2000년대 들어 둔산권이 개발되면서는 더 침체됐다. 이후 유성온천 주변이 개발되면서 궁동 로데오거리를 대학로다운 대학로를 만들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2009년 7월 유성구청에서는 로데오 거리를 되살리는 사업을 추진했다. 입구변에는 세련된 현대미가 물씬 풍기는 화살표 모양의 상징 조형물과 유성 소재 10개 대학을 대표하는 다양한 상징물들이 구간 곳곳에 세워졌고, 연중 젊음의 끼와 열정을 맘껏 펼치며 즐길 수 있는 간이 공연무대가 새롭게 들어서는 등 젊음의 명소로 새단장됐다.

유성문화원 관계자는 "어느덧 서른 살이 된 궁동로데오거리가 앞으로도 이름대로 자생하면서 성장하기 위해선 유흥 중심이 아닌 문화 중심의 공간 조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강은선 기자

*취재협조=(사)대전문화울림·중구문화원·유성문화원·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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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유성장터.
1883년 유성장터.
유성 냇가에서 나물파는 여인네들(1962년).
유성 냇가에서 나물파는 여인네들(1962년).
1970년대 유성시장 전경.
1970년대 유성시장 전경.

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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