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神父)들도 고해성사를 본다. 맡은 직무는 거룩하지만 그도 또한 작고 나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해성사를 보라고 배웠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회개와 쇄신의 삶을 살라는 뜻일 것이다. 신학생 때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해성사를 보았지만 어떤 때는 성사 보는 것을 잊어 한 달 반이나 두 달이 지난 후에 성사를 보기도 했었다. 신부가 된 후에도 고해성사를 보았다. 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이 아닌 2주에 한 번 꼴로 성사를 본다는 것과 성사 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부르심 받은 사제라는 직책에서 느껴지는 거룩함과 무게 때문이다.

신부가 된 후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드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들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나도 매번 성사를 볼 때 마다 새로운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같은 죄를 매번 고백 한다. 나는 매번 같은 죄를 고백하면서 낙담도 하고 실망도 많이 했었다. 한 번은 같은 죄를 또 고백해야 한다는 깊은 낙담 속에서 나보다 한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긴 외국인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짓는 죄라며 죄를 고백했다. 나의 고백을 들으신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말을 들은 그 순간 오히려 나는 내 안에서 생명이 약동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조건과 제한이 없이 사랑받고 있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고 있는 일이나, 맡고 있는 직책, 혹은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평가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창세기에 보면 창조 과정에 대해서 말하면서 각 창조가 끝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 10, 12, 18, 25, 31)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존재들이다. 게다가 우리가 잘하고 좋은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실패와 죄 중에 있는 그 순간에도 나의 가치는 소멸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가 바로 루카 복음 15장의 비유들이다. 유산을 달라고 하여 멀리 떠난 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께 말씀드린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우리는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그리고 나의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하다는 정보와 사건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그리고 나의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하다는 정보와 사건에 저항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나는 나와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랑으로 받아들여줘야 한다. 나의 약점과 한계, 실패와 좌절까지도!

무엇을 하고 있는 나, 무엇을 이룩한 나, 어떤 직책에 있는 나가 아니라 나를 존재 자체로서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참으로 위해 줄 수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그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그 사람 존재 자체로서 그 사람을 귀하게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불화의 원인은 대부분 그 이웃의 특정한 단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지 못해서 생긴다. 원인은 바로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다.

우리는 좋은 일들과 함께 나쁜 일들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실 좋고 나쁨이라는 것은 우리의 기준일 뿐이다. 단지 사건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기준에 좋은 일도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나쁜 일로 변할 수 있고, 나쁜 일도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좋은 일로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이다.(로마 8,28) 수없이 바람에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되풀이 하는 우리의 삶은, 그리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향기롭다. 오창호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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