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정 아동문학가
유하정 아동문학가
권력의 획이 바뀐 걸 토끼도 알고 있었을까? 교장선생님이 바뀌고 여름방학이 시작된 직후였다. 멀쩡하던 등나무가 통째 잘려나가고 플라스틱 가림막이 설치되었다. 등나무는 서로의 줄기를 감고 올라가 학교의 명물이 되었고 해마다 5월이면 보라색 꽃이 폈다. 나는 그 향기를 맡으러 일부러 학교를 찾아가 사색에 잠기곤 했다. 등나무가 사라지고 토끼도 사라졌다. 초등학교 도서관 옆 자리에 있던 토끼장의 토끼들이 계획이나 했던 것처럼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토끼가 탈출할 거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토끼들을 가둔 철창은 단단했고 쉬는 시간마다 일부 개구쟁이들은 토끼들을 괴롭혔다. 토끼들은 배가 불러도 먹어야 했고 쇠꼬챙이로 몸의 여기저기를 찔려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하얀꼬리토끼가 제안했을지 모른다.

우리 나가자!

나는 등나무가 잘린 교정의 아쉬움을 아도르노로 채웠다. 고통의 체험에 대한 부분을 읽던 중 탈출한 토끼들이 떠올랐다. 체험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며 외부세계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자만에 찬 즐거움일 뿐 진정한 체험은 아니란 것이다. 그럼에도 왜 토끼들은 그 잘못되고 부정적인 체험을 감행한 것일까. 그것은 사유가 체험된 고통을 치유하는 것과는 다른 지배 메커니즘의 문제인식에서 시작된다. 강자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참을 만했을지 모른다. 먹이를 줬기 때문이다. 지배나 문화산업이 고통의 체험이나 의식을 차단하지 않는다면 이런 부정적인 체험 속에서 인식의 기회가 제공된다. 토끼들의 의식은 열려 있었고 향기롭던 등나무꽃이 잘려 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아도르노는 천개의 눈을 갖는다는 브레히트의 명제와는 반대로 `획일성에 물들지 않는 사람`(Dissentierende)의 정확한 상상이 똑같은 붉은 안경을 쓴 천개의 눈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상상력의 주체는 토끼(입시제도 갇힌 지금의 아동으로 읽히길 바란다)였고 그 토끼는 탈출했으나 일주일만에 또 다른 아이들에게 발견되어 다시 학교 철창으로 향했다. 철창의 열쇠는 더 커졌고 주변은 더 단단한 무엇들로 막혔다. 하얀 꼬리토끼의 눈빛에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지난 주에 페이스북 CEO인 마크 저커버그가 이제 막 태어난 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당부하던 말은 이렇다. "어린 시절은 딱 한 번뿐이니 앞날에 대한 걱정은 너무 하지 말아라."

저커버그의 말에 공감하며 거기에 덧붙이고 싶다. 토끼들아, 철창 안에서라도 상상하라. 등나무가 없어도 향기를 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유하정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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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월 동안 유하정 아동문학가, 서윤신 FCD댄스컴퍼니 대표, 최민혁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성악수석이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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