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세계보건기구(WHO)는 보르네오 섬에 말라리아를 퇴치하고자 DDT를 뿌린다. 모기는 박멸됐으나 이상하게도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한다. DDT로 인해 굼벵이를 먹고 사는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 이엉을 엮어 얹은 지붕을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진 정부는 양철판으로 지붕을 덮게 한다. 이번에는 주민들이 집단불면증에 시달린다. 열대지방의 집중호우가 양철지붕을 때리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DDT로 죽은 벌레를 먹은 뱀이 죽는 것이었다. 잇달아 그 뱀을 먹은 고양이도 죽는다. 먹이사슬을 올라갈 때마다 DDT가 농축되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의 극성이 온 섬에 판친다. 쥐의 증가가 다른 전염병의 유행을 예고하자 WHO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놀랍게도 1만 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한다. 생태계가 심층의 질서를 반영하고 그 숨겨진 연결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심층은 더 깊은 심층질서의 특수한 경우이다.

현대문명은 이러한 생태적 진실과 연결성을 외면하고 단절과 독립의 터전 위에 합리성과 진보를 얘기한다. 그 결과 자연과 생명, 음식과 제도뿐만 아니라 , 정치와 경제 특히 일상의 관계와 정체성도 이러한 시각에 매몰된 지 오래이다. 그 예로 만남이나 대화조차 내면 깊은 곳 어딘가의 공통점보다는 상대의 외모나 지위, 부와 교육 등 다른 점들만 예리하게 인식한다. 상호공유하며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보다는 저울질과 측량을 통해 상대와 구별하고 뭔가 눈에 띄려 안달하며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인 양 착각한다. 자의식과 소유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모든 관계는 상호의존보다는 도구와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오늘날 유한한 지구에 무한성장을 노래하고 소비가 행복의 척도이자 지배적 문화패러다임이 된 것도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닌 셈이다.

그러니 지구적 식량위기 자원고갈 지속가능성 등 그 해법도 간단치 않다. 모든 것을 생산을 늘리거나 기술로 해결하려하지 생산에 맞춰 소비하고 삶의 질을 고려하는 전환이 쉽지 않다. GMO(유전자변형식품)와 화학농을 확대해 공급을 늘리려고 하지 식량수요 특히 육류소비(세계 식량의 40%와 농업용지의 70%가 축산용)를 대폭 줄이고 지역식량을 강화하는 쪽으론 생각하지 못한다. 외부효과 즉 생산 비용에 포함되지 않는 환경에 미친 부수적 피해 따위는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생태계의 건강이 곧 인류건강의 기본 바탕이라는 인식 또한 어렵다.

만약 다른 행성에서 현재의 지구를 탐사한다면 무엇을 가장 중대하고 인상적인 것으로 볼까. 인류의 시각과는 달리 하루 수억의 동물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꼽을지도 모른다. 육식의 파괴적 후유증은 매초 약 4000㎡의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10억 명은 배고파 굶어죽고 10억 명은 배불러 아파죽는 등 인간사회부터 심해에 이르기까지 생태계와 문화의 전반에 걸쳐 있다. 그것도 현대사회의 상징인 합리성의 이름으로 제도적으로 자행된다.

이것이 과연 매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정치적 이슈나 테러리즘보다 덜 중요한 일일까. 지금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하는 일상의 고민이다. 건강과 지구환경, 생명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일종의 투표행위이다. 과연 정치적 민주주의가 일상과 사적영역의 민주주의 없이 제대로 가능할 수 있을까.

이것이 건강과 동물윤리, 생태계보호와 윤리적 소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명과 소통, 연대와 공감을 추구하며 기존의 문화의 공적 담론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비건적 삶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살충제 계란과 간염 소시지 구제역 조류독감 등의 구조적 반복에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이 때, 근본적으로 대안적 삶을 고려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보도에 따르면 이미 채식과 경제를 조합한 베지노믹스란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그 시장규모가 급성장하고 있고 우리나라 비건과 채식인구도 1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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