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아파트 담장 장미 가득 핀 옆으로

어린아이 하나 울며 지나간다.

두 눈에서 질금질금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느라

꽃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끝내 가까이 다가가서

왜 슬피 우는지 이유를 물어 보지 못했다

길가에 가만히 서 있는 내 옆을 그 애가 지나간다

시인의 똥은 메마르고 다 썩어서 개도 안 먹는다는데

저 어린 작은 슬픔도 달래주지 못하는 주제에

시를 써서 도대체 무얼 어쩌자는 것인가

그저 남의 슬픔을 구경만 하고 다니며

아픈 현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이

고작 시를 쓴다는 자의 할 일이지

시정잡배만도 못한 자신이 슬퍼 운다

나도 그 나이 때쯤 무척이도 울었던가

배고파서 울었고

중학교 정문 게시판에 철 따라 등록금 미납자로 올려진

이름 석 자를 보면서 울음을 삼킨 적이 있다

자세히 보면 장미처럼 화사한 꽃들도

하나같이 검은 벌레들로 깊은 병이 들어있다

어느 날 길가를 걷다가 흙길에 뒹굴며 개미에게 끌려가는 지렁이를 본 적이 있다. 자잘한 개미 수십 마리가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물고 밀고 갈 때. 지렁이는 말라가는 몸이 땅에 끌려가며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찌해야 할까 잠시 망설인 적이 있다. 자연의 이치이겠거니 하고 돌아섰다. 그래도 떠나는 발길은 영 개운치가 않았다. 시는 삶의 반성문인가. 그래서 시인은 평생을 반성 속에 살아가는 것인가. 시인 스스로 그의 삶, 그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것이 시의 출발일 것이다. 맑고 영롱한 이슬 한 방울도 풀잎 위에 말라 사라질 때 흔적을 남긴다. 그 풀잎에 새겨진 흔적은 물방울이 남기고 떠나간 반성문이다.

그러나 반성을 하려면 그 반성하는 자신을 다시 반성해야 하는 법이다. 우리가 반성하지 않는 것도 반성해야 하지만, 너무 쉽게 반성하는 것도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반성하고 다시 반성만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반성은 반성으로만 끝이 나서는 안 된다. 시에서 너무 쉽게 반성을 하지 말라는 주문도 있다. 시는 윤리교과서가 아닌 까닭에 도덕적 관점으로 무엇을 성급히 판단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오히려 그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 더 인간적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못하고 허상들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김완하 시인·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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