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독설가 버나드 쇼(Benard Shaw)의 유명한 묘비명이다. `내 언젠가는 이 꼴이 될 줄 알았지`로도 번역된다. 참으로 기발한 표현이지만 이승의 갖은 영화를 다 누리고 아흔을 넘겨 산 사람이니 아무래도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묘비에도 실로 기막힌 문장이 있었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때를 만나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있었다.(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조선 말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묘비명이다. 정변의 동지 박영효의 글이라 한다.

김옥균(1851-1894). 충남 공주 출신. 안동 김씨로 22세에 장원급제. 문장 시 글씨는 물론 그림 음악에다 온갖 잡기에도 능했고 친화력 카리스마까지 갖춘 인물. 정변으로 조선을 뿌리째 바꾸자 하였으나 삼일천하에 그치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에는 이후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이 끊임없이 그의 목숨을 노렸고 일본측에서 보자면 그는 조선과의 외교적인 마찰만 일으키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러나 김옥균은 자유분방하였다. 뛰어난 재주와 타고난 사교술로 일본의 거물들과 친분을 쌓았고 이토 히로부미와는 바둑 친구이기도 했으며 그를 따르는 일본인도 많았다. 워낙 명필이라 휘호를 써주며 돈을 벌었고 신문에 광고까지 하였다. 또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유흥비로 쏟아 부었으며 여자문제도 복잡하였다. 머물던 집 주인 여자와는 아들도 낳았고 홋카이도에서는 게이샤와의 사이에 딸도 있었다. 조선에서 생모는 자결하고 아내와 어린 딸은 노비로 고초를 겪는 동안 그는 일본여인들의 품을 전전하였다. 당시 그의 속내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고독한 망명객이라기보다는 분주한 방탕아이자 어쩌면 대담한 배포를 가진 낙천가였다. 같이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는 훗날 그를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기협잡배라 하였다.

그런데 말이다. 낙천적 기질은 혁명가의 필수요소. 비관적인 기질로는 혁명이 되질 않는다. 중국의 손문은 평소 별명이 손대포(孫大砲)였다. 일개 의사가 걸핏하면 대청제국을 뒤집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또한 혁명과 독서 그리고 여자가 자신의 취미라고 당당히 밝히며 많은 일화를 남긴 호색가. 허나 손대포는 신해혁명으로 청을 무너뜨렸지만 김옥균은 비상한 공적이 없었다.

1894년 3월 김옥균은 중국 상하이로 간다. 그의 목숨을 노리고 접근한 홍종우와 함께였다. 조심하라는 충고가 잇달았지만 무시한다. 도착 다음날 결국 홍종우의 총에 목숨을 잃고 마니, 나이 마흔 넷이었다. 서울로 옮겨진 시신은 양화진에서 효수되고 찢어진 사지는 전국을 돌며 구경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에선 대대적인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도쿄 아오야마 외국인묘지에 묘가 마련되며 이후 예의 그 명문 묘비도 세워진다. 도쿄 모 사찰 경내에도 그리고 후일 충남 아산에도 무덤이 만들어지니 시신 없는 무덤이 셋이나 된다.

언젠가 동해안 경북 포항의 호미곶을 지나다가 소스라쳐 놀랐던 적이 있다. 바다를 뚫고 힘차게 솟아오른 팔뚝과 손. 갑오년 그 때 양화진에서 잘린 김옥균의 왼팔은 조선 8도를 돌고 돌다가 바로 이 곳 바다에 던져졌었다. 오호 김옥균이여. 비상한 죽음을 남긴 한 혁명가의 팔과 손을 `상생의 손`이라는 이름으로 동해안 바닷가에서 만났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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