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에 적힌 무연휘발유란 글씨를 보고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운전을 배운 지 얼마 안됐다면 그럴 만 하다. 1993년 판매가 금지되기 전 유연(有鉛)휘발유가 판매됐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연(鉛)은 납이라는 뜻으로 연기라는 뜻의 연(煙)과는 다르다.

납은 금속 가운데 가장 무겁고 연한 원소다. 산화되지 않고 불에 잘 녹아 가공이 쉽다. 연판, 연관, 활자 합금를 만들 때 쓰인다. 휘발유에는 성능을 높이기 위한 첨가제로 사용됐다. 그 편리함 탓에 로마시대를 비롯해 인류사에 광범위하게 등장한다. 소량만 섭취해도 독성이 매우 강해 쉽게 중금속 중독 현상을 일으킨다. 인체는 납이 체내로 들어오면 무기질과 혼동하게 된다. 철분인 척 하면서 혈액의 주 성분인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는 등 신진대사를 방해한다. 중독이 심하면 뇌손상을 일으켜 정신 이상을 일으키거나 귀머거리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이 자동차의 시대를 열던 1922년 토머스 미즐리는 납성분을 휘발유에 첨가하면 차량 성능을 저하시키는 노킹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석유 회사는 유연 휘발유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지구 대기 중 납 성분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인간의 욕심이 지하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침묵의 학살자를 지상으로 소환한 셈이다. 일부 학자가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석유업계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약 5만여명의 어린이가 납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미국이 유연휘발유를 판매금지 시킨 건 1986년이다. 우리나라는 그로부터 7년이 더 흐르고서야 유연휘발유가 사라졌다.

유럽발 `살충제 달걀` 파동이 중독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손쉬운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했고 위험을 예방할 제안은 묵살됐다. 물론 살충제 성분은 납에 비하면 독성이 현저히 낮다. 지나친 걱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과 몇십년 전엔 유연휘발유가 정신이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는 대부분 생각하지 않았다. 인류는 100년 전과는 너무나 다른 지구 환경을 빚어냈다. 살충제 성분이 되는 물질들 중 상당수는 지난 1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인위적 화학물질이다.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식품안전관리시스템을 재정립하는 타산지석의 기회가 되기 바란다.

취재2부 이용민 차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