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간호사였지만 이곳에서는 수녀로 불렸다.

1962년 소록도 사람들은 이들을 `○○씨`라는 호칭 대신 천사의 이미지인 `수녀님`으로 불렀다. 한센인들은 소록도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을 `선생님`으로 불렀지만 이방인인 이들에게는 특별한 존칭을 썼다.

이들과 함께 했던 김연준 소록도성당 주임신부는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렛은 그 누구도 돌보기를 꺼렸던 한센인들의 환부를 만져주고 고름을 닦아주는 등 자신의 환자 돌보듯 했다고 17일 설명했다.

소록도 마리안느-마가렛 노벨평화상 후보추천 홍보차 정부세종청사를 찾은 김 신부는 이날 국무총리실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소록도에서의 이들의 활약을 소개했다.

이들과 14년 전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김 신부는 "이들이 수녀로 알려져 알게 모르게 피해를 봤다"고 운을 뗐다. 김 신부는 이들이 40년 넘게 소록도에 근무하면서 한푼의 보수도 받지 않았는데도 월급을 받은 것처럼 왜곡돼 알려져 있다며, 소록도에서 40년 넘게 살았으면서도 빈손으로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소록도에서 뼈를 묻겠다`고 한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김 신부는 기억했다. 그러나 이들은 연금도 없이 빈털털이로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한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70세의 고령임에도 아무도 이들의 노후를 챙겨주려 하지 않았다는 것.

간호사로 40년 넘게 근무했지만 연금 한푼 받지 못한데다 지병(췌장암)까지 찾아와 병 치료를 한국에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 신분이어서 70세를 넘어서도 일을 하지 않으면 집을 비워줘야 하는 압박감도 한국을 떠나게 만든 원인이 됐다.

무엇보다 수녀로 알려진 바람에 이들의 희생과 사랑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빈손으로 떠나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마리안느는 71세, 마가렛은 72세 때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갔다.

김 신부는 "현재 마리안느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마련해 놓은 집에 살고, 마가렛은 인스부르크 시립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김 신부는 이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는 수녀가 아닌 간호사 본래의 직업을 찾게 해주고 그들의 고귀한 삶을 알리고 싶어서였다. 특정 종교의 사람이 아닌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세상에 알리고 새로운 나이팅게일 상을 전하기 위해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김 신부는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에게 우리 국민은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버림받은 인권이 없는 비참한 한센인들에게 이들은 친구가 되어주고 어머니가 되어줬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이사장 김연주 신부)은 한센병 퇴치와 계몽에 큰 역할 한 이들 간호사의 헌신적인 삶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벨평화상 추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가칭)마리안느-마가렛 노벨평화상범국민추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곽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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