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왜군이 상륙함으로써 시작된 임진왜란 초기, 침략군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8000여 명으로 구성된 신립 군(軍)이 용전에도 불구하고 왜(倭)의 고니시 군(軍)에게 패퇴한 사실이 보고되자 선조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는 전쟁 수행 결의와 필요한 조치의 이행보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도주를 먼저 고려하였다.

선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6번이며 별칭은 `충성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두려움`과 `온화함`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 유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두려움을 많이 느끼며 타인에게 의존함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세상을 위험하게 인식하므로 가족 같은 울타리 안에 머물기를 바라고 동맹을 맺고자 한다. 이들은 타인의 공격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자신을 온화한 사람으로 인식시켜 공격을 유발하지 않으려고 하며, 모호하고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을 어려워한다.

1552년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선조는 1567년 명종이 후사도 없이 34세에 세상을 떠나자 조선의 스물일곱 명의 왕 중 열네 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학구적이고 검소하며 다른 왕에 비해 처첩도 많이 두지 않고 온화한 임금이었던 그는 평화시기만 지속되었다면 그런대로 무난한 리더십을 보였을 것이다.

모름지기 한 국가의 최고 리더인 왕이라면 늘 비상시를 대비하고,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국부 증진과 국방력 유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선조 재위 25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조 개국 이래 초유의 국가 간 전면전쟁 상황이었으므로 비상한 리더십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유형의 격정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그의 리더십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백성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그의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에 관한 것이었다.

전란 발발 15일 만에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자 도성을 비움과 동시에 명나라로 도주하자는 주장을 반복하는 모습은 그의 격정인 두려움이 표출된 극치였다. 그는 명나라를 자신을 보호해 줄 울타리로 꼽았다. 전란 중에 명과 왜가 강화조건으로 조선의 분할을 논하는데도 그의 관심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집중되었으며, 전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두려움으로 신하들에게 잘못을 투사하고, 주변에 대한 불신으로 수 차례 선위파동을 일으키는 등 그로 인한 분란이 그치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그가 바로 비상시 국가 운영의 장애가 되었다.

6번 유형은 충성심·통찰력·근면함·끈기 등을 갖추고 늘 최상으로 과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걱정·두려움·우유부단 등으로 인하여 그들만의 장점을 상쇄시켜 버리고 종종 스스로 실패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특히 이들의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움을 남기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내면의 두려움을 인식하고 진정한 용기를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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