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 딴의 한소끔 밥꽃을

백기처럼 들어 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 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마저 갈 수 있겠다

이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도처에는 꽃이 핀다. 한여름 땡볕 속에도 피는 꽃이 있으니. 길가의 배롱나무 꽃빛은 한층 더 짙고 담장에 능소화 꽃잎은 더욱 붉다. 그러니 꽃은 절대 봄에만 피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 어찌 이 세상에 피는 꽃을 우리 눈으로 다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눈에 보이는 꽃은 한갓 꽃의 일부 그 밖일 뿐. 진정한 꽃은 꽃의 중심 그 안쪽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꽃은 우리 마음 위에 피어나는 것. 마음으로 핀 꽃은 가장 오래가는 법이니. 화무십일홍이라고 했지. 피어난 꽃은 절대로 십일을 넘기지 못 하는 법이라고. 꽃은 그 자체로 피어 있는 짧은 시간을 암시한다.

그러니 꽃은 피어 있는 그 이전과 이후가 더 중요한 순간일지 모른다. 오히려 꽃은 피어 있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긴 시간을 공들여 온 심혈의 순간들이 더 빛나는 꽃이 아닌가. 그러니 모든 시간은 아름답고 또 모든 순간들은 향기롭다. 그러므로 제일 아름다운 꽃은 태양이다. 매일 온누리에 꽃 피어 하루를 불러 우리에게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는 그 꽃. 언제나 피어나고 또 언제나 지는 꽃. 시간 꽃. 우리 모두 그 시간의 꽃잎을 뜯어먹고 사는 꽃들 아닌가. 김완하 시인·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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