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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영의 역사산책] '안의 3동' 유람기

2017-08-10기사 편집 2017-08-10 15:5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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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입추(立秋)가 지났으니 가을이나 여전히 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이제 바로 말복(末伏). 글자 꼴 그대로 더위 먹은 개처럼 널브러질 수밖에 없으니 막판 뜨거움을 피해 백두대간 넘어 경남으로 떠나보자.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육십령 터널을 벗어나면 곧 만나게 되는 이곳 '안의(安義) 3동(三洞)'. 조선시대 선비들이 꼭 한 번 찾고 싶어 했던 곳이자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그 경치에 빠져 시를 읊고 시름을 잊던 꿈의 유람지였다.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린 산맥 사이로 물길을 타고 3개의 계곡을 이루니 이름하여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 수려한 산세에다 곳곳에 넓은 암반과 기암괴석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정자들이 맑은 물과 어우러져 고상한 아취를 풍긴다. 물론 그 구석구석엔 우리의 역사가 겹겹이 새겨져 있다.

안의(安義)의 원래 이름은 안음(安陰). 그 안음이 안의로 변한 데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조선 영조는 평생을 콤플렉스와 울화증에 시달린 왕이었다. '동이'로 더 잘 알려진 모친의 '신분상 약점'에다,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당시 소문난 미남이자 문제아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 거기에다 장희빈 소생인 이복형 경종을 독살시켰다는 '간장게장 사건' 등이 공공연히 시중에 회자되어 영조를 괴롭혔고 그런 흉흉한 분위기 아래 재위 초기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충청·경상·전라도를 연계한 이 반란은 아예 임금을 바꾸자는 대규모 정변이었다. 그런데 그 난의 주모자 정희량이 이곳 원학동 출신, 게다가 여기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많은 지역이 반군에 호응하였고 또 가장 오랫동안 끈질기게 저항하던 곳이었다. 정희량은 영조가 두고두고 치를 떨던 역적이었고 안음은 도저히 용서 못할 역모의 땅이 되었다.

영조 43년 1767년 윤7월 인근 산음(山陰)현에서 유교국가 조선을 발칵 뒤집는 일이 일어났다. 종단(終丹)이라는 7세 여아가 사내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조정을 강타한 이 괴이한 일을 두고 대신들은 즉시 그 요물들을 없애자 하였으나 영조는 그들 역시 나의 백성이라며 일축하고 엄중 조사를 명하였다. 그 결과 종단의 집을 드나들던 젊은 소금장수의 소행으로 밝혀졌고 논란 끝에 어린 모자는 머나먼 섬으로 유배되고 얼마 후 둘 다 죽고 말았다. 영조 43년 윤7월 왕조실록을 보자. '안음과 산음은 서로 경계를 접한 곳. 전에는 역적 정희량이 생겼고 지금은 이런 음부(淫婦)가 생겼다. 아미산이 있었기에 삼소(三蘇)가 태어났던 것이니 이름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안음을 안의로 고치고 산음을 산청으로 고치라.' 이리하여 안음은 안의가 되었고 지금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으로 그 이름의 명맥을 잇고 있다.

중국 사천성의 아미산이 있었기에 천고의 문장가 소동파 삼부자(三蘇)도 사천성에서 태어났다 하였으니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임이 조선시대 부동의 신조였다. 역으로 변고나 역모가 일어나면 그 지역 이름은 어김없이 처벌 대상이 되었다. 그런 탓에 충주 청주에 연원한 충청도도 공주 홍성이 가세하여 공홍도도 되었고 충공도, 청홍도도 되었다. 충청도 역시 결코 조용한 곳이 아니었다.

도시로 돌아온다. 육십 명이 모여야 함께 넘었다던 그 험한 육십령을 밤중에 혼자서도 바람처럼 달린다. 조선의 그들이 일생의 염원으로 삼던 일을 단 하루에 이룬다. 분명 별세계에 살고 있으나 도시는 여전히 후텁지근하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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