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해 봄 인공지능인 알파고와 이세돌 프로기사 간의 `세기의 대결`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일면을 실감했다. 이 대결은 지금까지 아무도 미리 내다보지 못한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인공지능과 공학로봇, 빅 데이터와 클라우딩, 3D 프린팅과 퀀텀 컴퓨팅 등 새로운 과학기술이 우리의 일하는 방식이나 소비 행태를 포함한 생활방식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 올 것은 명약관화해 보인다.

국민생활의 규범이 되는 법과 규제기준을 만드는 정부의 역할은 어때야 할까. 정부는 공공의 이익을 지키는 동시에 혁신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기술발전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하는 데 그 방법은 무엇일까. 스위스 세계경제포럼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은 `민첩한 통치 시스템의 구축`을 강조한다. 여기서 `민첩함`이란 많은 정책을 더욱 빨리 제정하라는 것도 아니고, 정책입안자들이 쉬지 않고 바쁘게 일하라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 의미는 지속적으로 급변하는 새로운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개편할 수 있는 회복력 높은 법과 규제기준 체제를 갖추는 데 두고 있다.

깊이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법과 규제기준을 세분화, 구체화, 명확화 할수록 법 집행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높아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가능한 규제기관이 재량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고, 법과 규제기준을 일의적, 확정적으로 만드는 것을 선호 한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규정의 명확화는 법적 안정성과 미래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으나, 개별 사안에서 구체적 타당성 있는 법 집행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만약 정부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모두 예측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된다면, 법과 규제기준을 가능한 명확하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현실이 그렇게 안정적이지 못하다면, 집행 현장에서의 불합리와 부작용이 훨씬 클 소지가 크다.

혹시 민원 업무와 관련해 `사정은 이해하는데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이는 일의적, 확정적 법 규정으로 인한 부조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불합리한 규정은 집행되지 말아야지 어쩔 수 없이 집행될 사안이 아니다. 그 동안 역대 모든 정권에서 집권 초기마다 규제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규제에 대한 불만이 줄었다는 징후를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왜 그럴까. 혹시 우리의 생각이 법과 규제기준을 잘 만들면 된다는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나는 의심한다. 법과 규제기준은 불완전할 수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율주행 자동차, 드론, 우버, 비앤비 등 새로운 사업 플랫폼이 현재의 규제 프레임워크 내에 제대로 반영돼 있지 않아 마찰을 빚고 있다는 뉴스를 종종 접한다. 기술혁신이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는 제4차 산업혁명이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사한 마찰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벽한 법과 규제기준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법과 규제기준이 불완전 할 수 있다면, 현행 규정의 일률적 준수만을 고집하는 현행 집행 시스템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클라우스 슈밥이 지적했듯이 개별 상황에 맞춰 구체적 타당성 있는 법 집행이 이루어지도록 회복력 높은 법과 규제기준 체제를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에 우리는 놓여 있다.

유연한 법 집행을 위해서는 현장 공무원의 역할 강화, 공정성 확보 장치 등 검토해야 할 사항이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부와 국민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재정립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둘의 관계는 정부가 우월적 지위에서 법이나 규제기준을 만들고, 국민은 이를 따라야 하는 수직적 관계에 있다. 국민 개개인의 특수성, 어려움은 민원으로 수용 여부는 전적으로 담당자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현행 구조이다. 그러나 앞으로 국민도 법 집행의 당사자로서 자신의 어려움, 특수성을 당당히 권리로써 그 반영을 요구할 수 있도록 개편할 필요가 있다. 운동장을 평평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현장의 역동성을 담아내고 민간의 창의성을 북돋우는 법 집행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집단지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경용 금강유역환경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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