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좌절된 개혁 의지가 오늘 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주는 이유는 그가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광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5번이며 별칭은 `탐구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욕`과 `토템`(Totem)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 유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탐욕은 지식과 연결된다. 이들에게 인간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열정이 그것을 보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들 중의 매우 뛰어난 특성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이들은 이상주의적이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정서를 무시하기도 한다.

1482년에 태어난 조광조는 17세 때 함경도에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그의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마침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그곳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의 문인이므로 조광조가 김종직 이후 사림세력의 맥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대의 정치적 오류를 개혁하고자 했다. 이때 주목한 인물이 사림의 영수인 조광조였다. 그는 1515년 알성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간원에서 관직을 역임하였고 홍문관 수찬, 교리, 부제학을 거쳐 1518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조광조는 이상정치, 즉 공자와 맹자가 정립한 도학정치를 실현해 보고자 하였다. 임금의 철저한 수신을 비롯해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고, 기예 위주의 과거제도를 바꾸어 덕성에 바탕한 인재 선발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였다. 동시에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을 추진하였다(인물한국사).

한편 조광조의 성격특성의 격정인 `토템`은 기득권 세력의 불합리를 수용할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고 개혁에 장애라고 판단되는 훈구세력을 제거토록 추동했다. 그러나 그를 영수로 하는 신진 사림세력은 너무 이상에 치우쳤으며 수단은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519년 조광조 등이 시도한 위훈삭제(偉勳削除)로 중종반정의 공신 중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권력의 핵심인 공신세력들을 겨냥한 것이어서 그들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 및 사림세력을 발탁했던 중종 역시 현실 정치 앞에서 마음을 돌리게 되고 조광조 이하 70여 명은 모반을 획책한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이로써 그가 추구하던 이상정치는 막을 내렸다.

5번 유형에게는 심오한 지식에 기반한 통찰력으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정답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평범한 인간관계보다 특별한 인간이 가진 최고의 가치, 비상한 재주, 이상에 몰두하고, 지적으로 거만하며 너무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격정인 탐욕을 미덕인 초연함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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