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위 계승문제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시작된 두 나라 왕족, 귀족들 간의 전쟁은 1337년부터 100여 년간 지속된다. 그 긴 시간동안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압박과 피해를 입은 지역은 프랑스 해안도시 칼레였다. 영국입장에서 칼레는 반드시 교두보로 확보해야 할 군사적 요충지였고 프랑스 측에서도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였다.

100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의 영웅은 왕도 귀족도 아닌 오를레앙 지역의 소작농의 딸, 잔다르크와 칼레의 시민들이었다. 잔다르크의 출전은 유럽대륙을 향해 품었던 영국의 야망을 결국 좌절시켰고, 칼레에서 벌어졌던 시민들의 행동은 특이할 만한 사건으로 회자되고, 현재까지도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어 희곡, 동화, 에세이, 조각상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중 G. 카이저의 희곡 `칼레의 시민들`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숨과 의무 사이에서 얼마나 큰 심적 고통과 갈등 국면에 처해 있었는지를 알게 한다.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해안도시 칼레는 11개월간의 격렬한 저항 끝에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분한 마음에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살육하려 하였으나, 고전적 전통과 그 문화가 숨쉬는 칼레를 보호하기 위해 파괴와 살육이 아닌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 `칼레 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나 그 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만 한다. 도시에서 가장 신망이 높은 시민 6명을 뽑아, 밧줄을 목에 걸고 영국군 진영으로 와서 도시의 열쇠를 건넨 뒤, 교수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기의 순간은 넘겼지만 칼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여섯 명의 희생자원자가 필요했다. 첫 번째 자원자로 이름난 부자, 생 피에르가 나섰다. 이어서 칼레 시장, 한 상인과 그의 아들 등이 자원하였다. 이들은 칼레의 핵심인물이며 부유한 삶을 누리던 귀족들로 자원자는 모두 일곱이나 되었다. 여섯이면 충분한데 한 사람이 초과된 것이다. `첫 종이 울림과 동시에 각자 자신의 집에서 출발해서 맨 마지막으로 장터에 도착하는 사람은 살 수 있다`는 생 피에르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한다. 이제는 일곱 명의 자원자 중에서 목숨을 부지할 마지막 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에 칼레 시민이나 희생자원자들에겐 갈등과 번뇌가 이는 밤이었다.

새벽 첫 종이 울리자 집을 출발한 자원자들이 칼레 시를 구하기 위해 차례차례 장터에 나타난다. 그런데 가장 먼저 도착하리라 예상되었던 생 피에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간밤에 독약을 마시고 싸늘한 시체로 변한 아들의 주검을 들것에 싣고 나타난다. 생 피에르는 일곱 사람 각자에게 생겨난 생존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나머지 여섯 자원자들이 선택한 희생의 길을 아무런 동요 없이 나아가도록 스스로를 희생했던 것이다. 이렇게 선택된 여섯 시민들은 죽음을 숭고하게 받아들여 칼레를 구한다.

죽음을 택한 일곱 시민들의 행동을 기득권층이기에 마땅히 감당할 도덕적 책무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그동안 누리면서 편하게 살았으니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야말로 생명경시에서 오는 생각이다. 전쟁에 출전하는 병사들도 살아올 목적으로 전쟁터로 향하는 것이지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죽을 각오로 임하는 독립투사들도 해방된 조국에서 가족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심지어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조차 자신들에게 맞닥뜨린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고 한다. 생명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빈부격차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칼레의 시민들`은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회피하는 시민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하였지만 동시에 시민이라면 그 누구도 도덕적 책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240여 년 전 당시 소작농의 딸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잔다르크나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칼레의 일곱 시민들 모두는 고결하고 가치 있는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도덕적 책무를 다하였다. 맹주완 아산문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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