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연대기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다. 초점 없는 눈,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걸음걸이, 기괴한 소리는 어두운 밤, 공포의 대상이다. 유령, 뱀파이어 등 인간의 공포를 조장하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공포소구의 강력한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영화 `부산행`이 개봉되면서 좀비는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좀비 무리가 기차를 쫓는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좀비는 마니아틱한 무서움을 준다. 영화뿐만 아니라 문학, 게임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장악하고 있다.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존재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공포가 두려우면서도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잔인한 살육자, 영혼 없이 떠오는 존재 등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현대의 악몽이다.

`부활한 시체`를 일컫는 좀비는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의 종교인 부두교에서 유래했다. 부두교의 사제, 주술사가 시체를 파내고 소생시키는데 이렇게 부활한 좀비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간다.

책 `좀비연대기`는 좀비를 소재로 한 세계적 작가들의 단편집이다. 독립된 장르로 자리 잡은 자리 잡은 상황에서 문학사적으로 좀비의 탄생과 자취를 맛볼 수 있는 클래식들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쓰여져, 이후 좀비 소설, 영화 등에 영감을 주거나 결정적 영향을 준 좀비의 원형이기도 하다.

윌리엄 B. 시브룩의 `마법의 섬`(1929)은 좀비라는 존재를 서구권에 처음 알렸다. 소설에 `Zombie`라는 단어를 처음 들여온 작품일 뿐 더러 최초 좀비 영화인 `화이트 좀비`(1932)에 영감을 줬다. 특히 마법의 섬 중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투셀의 창백한 신부` 등 2개의 단편은 좀비 문학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작품들이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3)도 좀비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동명의 영화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오늘날 영화에서 보여주는 좀비는 흡혈괴물에 한정된 게 사실이다. 맹목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을 쫓아 물어뜯는다. 하지만 이 책에 묘사되는 좀비들은 독자적인 의식 없이 주술사의 지배를 받는다. 섬뜩한 공포의 대상이면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흔들리는 연약하고 쓸쓸한 존재이기도 하다. 어쩌면 현대 좀비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원형의 좀비는 낯설거나 덜 자극적일 수도 있다. 잔인한 살육자라기보다 주술사에게 조종당하는 좀비는 사악하면서도 나약한 인간의 이중성, 그로 인해 빚어지는 미묘한 공포를 서늘하게 드러낸다. 세계적인 작가들이 대가의 숨결로 빚어낸 작품들은 매혹적이면서 섬뜩하고 우아한 클래식 호러의 맛을 선보인다.

김대욱 기자

로버트 어빈 하워드 외 지음 /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380쪽 /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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