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이 위기에 처했다. 거듭되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압박 강화는 남북대화 채널 확보를 위한 접촉부터 어렵게 만든다. 무엇보다 미국의 대북기조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는 이유로 국내 보수야당의 공세가 거세다. 현실을 도외시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아예 베를린 구상을 폐기하고 무력사용 등 강력 대응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2차 발사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화성-14형은 미국 동부 뉴욕 등지까지 타격이 가능할 정도의 성능이다. 미국이 화들짝 놀라 법석을 떠는 이유도 핵탄두 탑재 미사일이 언제든 본토를 넘볼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우리 역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북의 핵 등 비대칭 전력에 맞설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미사일 발사 직후 사드 발사대 임시 배치와 우리 탄도미사일 탄두 중량 확대를 위한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 협상에 나서도록 지시했지만 근본대책은 아니다. 국제사회의 제재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대북제재도 검토 중이라지만 실효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는 사이 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베를린 구상은 힘을 잃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평창동계올림픽 북한 참여, 인도적 차원의 남북 교류 등도 헝클어지게 됐다. 문 대통령의 대북기조가 도발에는 엄정한 대응을 한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기에 사드 발사대 배치나 탄두 중량 확대, 독자제재 강화 등이 대화의 단절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드러내 놓고 대화를 하자고 나서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하다. 북은 우리 정부가 제의한 남북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 등 공식 대화에 일체 반응하지 않고 미사일 발사로 응답했다.

이는 `한반도 운전자론`을 앞세워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비핵화를 주도하려는 우리 정부에게 커다란 타격이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가 남북 당사자의 손을 벗어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분단 당시부터 남북의 의지보다는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다. 북 미사일 도발로 촉발된 현재의 위기 상황 역시 남북의 문제로만 인식해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워싱턴이나 베이징의 전략가들이 진정으로 남북간의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반도는 미·중·일·러의 직접 충돌을 막아주는 완충지대다.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군비 경쟁에 나설수록 주변 강대국의 존재감은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도 한반도 이니셔티브 다툼이란 맥락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 미사일의 본토 공격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위해 군사행동 보다 대화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를 배제하고 중국 및 북한과 적절한 수준의 타협을 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북한은 체제 보장과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에서 벗어나는 일이 우선이다. 핵과 미사일은 이를 겨냥한 벼랑 끝 전술이다.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외교전략을 펴온 북이기에 미국의 제의가 오면 마냥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간 빅딜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아예 미 재야에선 남한 주도의 통일 방안인 `하나의 한국` 원칙을 포기하라는 주장마저 나온다. 우리가 우려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북 핵과 탄도미사일은 한반도를 신냉전 체제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로서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주변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국익의 손상이 없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는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미국과 소통을 확대하고 긴밀히 공조를 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보수야당도 북에 대한 선제 타격이나 미국 전술핵 재배치, 자체 핵무장론 등의 주장을 접기 바란다. 이는 국민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줄지는 몰라도 안보 위기 해소에는 효용가치가 많지 않은 것이다. 평화는 무기가 아닌 대화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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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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