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도 역시나 덥다. 그런데 선풍기도 에어컨도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없던 옛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더위를 피했을까?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중국 송나라 사람 서긍은 `이 나라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주로 개울에서 목욕을 한다. 남녀 구별 없이 옷을 언덕에 벗어놓고 온몸을 벌거벗은 채였으나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당시엔 벌거벗는다는 게 그리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고 따라서 자연히 `벗은 만큼 시원했을` 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고 점잖음과 체통이 중시되며 분위기는 변해갔다. 몸은 옷으로 더 단단히 감추어졌고 그것은 예(禮)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여름이면 삼베옷을 입고 부채나 때론 죽부인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식혔다. 그래도 더우면 다만 최소한으로 벗었으니 바로 탁족(濯足). 산간계곡에서 발을 드러내 물에 담그며 더위를 달랬다. 특히 양반들은 평소에도 의관을 정제한 데다 제사 때 목욕재계를 제외하곤 거의 몸을 드러내지 않아 여름이면 더위는 물론이고 몸 여기저기에 염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해괴한 풍습도 생겼다. 산에 올라 발가벗은 채 상투를 풀어헤쳐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고 성기를 햇볕에 쬐던 이른바 풍즐거풍(風櫛擧風). 현대판 누드 삼림욕이자 염증치료법이었다. 몸을 가두다시피 하던 그 극단(極端)은 이렇게 또 다른 극단을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역시 그들답게 더위의 이치를 곰곰이 따졌다. 더위는 양(陽)과 동(動)의 기운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정(靜)의 상태를 유지할 때 음(陰)의 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하였다. 임진왜란 와중 유배지의 좁은 집에서 한여름을 보냈던 이산해는 `한여름 복더위 좁은 집에 있더라도 눈을 감고 꼿꼿하게 앉아 있으면 몸에 땀이 흐르지 않는 법`이라며 고요함의 힘이 움직임의 힘을 제압한다 하였다. 같은 시기 김우급이라는 학자는 `몸이 한가하면 괴로운 더위는 없는 법, 마음이 고요하면 저절로 시원함이 생긴다.`라고 시를 읊었다. 허나 굳이 시비를 하자면 `마음의 고요함`은 어디 쉬운 일인가.

먼 후일 정조임금은 조선 선비식 피서의 정점을 찍는다. 정조의 집무실이 협소하고 바람이 통하지 않아 지독히 더웠다. 보다 못한 신하가 서늘한 별채로 옮길 것을 권하자 `더위를 피해 서늘한 곳으로 옮기면 거기서도 또 다시 더 서늘한 곳을 원할 것이다. 지금 있는 이곳에 자족하고 참고 견디면 여기가 바로 서늘한 곳이다.`라며 그 제안을 물리친다. 그리고 `더위를 물리치려면 독서만큼 좋은 게 없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몸을 주재하니 바깥 기운이 내 몸에 들어오지 못한다. 금년 여름 더위가 대단했지만 나는 독서를 중단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임금 신분에 시원한 곳을 마다하고 독서로 더위와 정면으로 맞섰던 정조의 기개가 참으로 놀랍다.

조선 말 실학자 이규경은 간단한 방법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아주 더운 날 얼음을 두 젖꼭지 위에 올려놓고 부채질을 하면 시원한 바람이 쏴하고 불어 차가운 기운이 뱃속으로 스며든다. 심히 통쾌하고 상쾌하다.` 어떤가. 에어컨 전기료가 부담스럽거나 선풍기 바람이 질릴 때 한 번쯤 해봄직하지 않은가. 하긴 조선시대 얼음이란 벼슬자리에 있을 때나 조정에서 하사하던 귀한 물건이었다. 지금은 온갖 피서용품이나 청량제가 지천으로 널렸지만 어째 갈수록 더 덥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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