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올라온 햇멸치

개다리소반에 쏟으니

시월 바다 날 비린내

파란 물결로 퍼진다

혼자 살수록 뼈 부실해질까

검은 똥 빼며 먹어 본다

만만해서 똥이라 부르는

까맣게 말라붙은 내장

머리 향하여 꼬리 말린 모습

배곯다 잠든 새끼 고양이 같다

꼬리에 내장 있었다면

무거워 가라앉아 버렸겠지

근육만으로 물살 지피다 타 버렸다

쓴맛에 죽어서도 버려지는 또 하나의 생이다

흰 접시 위 수북이 똥처럼 쌓인 마른 바다

집 밖 화단 해당화 있던 자리에 묻는다

꼬리 아닌 가슴만으로 遊泳하기를

멸치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바다

하나의 까만 섬으로 누운 것이다

사물 하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얼마나 넓은 시간과 공간적 거리를 인식해야 하는지. 시적 인식의 깊이란 이런 차이에서 오는 법. 시의 인지적 충격이란 바로 이러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많은 시편 가운데서 이처럼 사려 깊은 시심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어머니가 보내온 멸치는 언제나 햇멸치다. 고향에서 올라온 멸치를 다듬으며 시인이 느끼는 고향. 그것은 무엇보다도 넓은 바다 푸른 파도다. 그것은 시인의 좁은 방안에도 날 비린내를 풍기며 파란 물살로 출렁인다. 누가 알았으랴. 멸치가 제 가슴께에 끌어안고 있는 고 새까만 똥이 실은 그가 한 생을 헤엄치며 살아온 바다라는 걸. 바로 그 바다가 검게 말라버린 것이라는 이 엄청난 사실을.

그렇다. 멸치에게도 생은 가파르고 험한 세파 속을 헤쳐 가는 것이니. 시인이 멸치를 맛보는 일 그것은 고향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지는 그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시인은 멸치의 배 안에 새까맣게 굳어버린 바다를 해당화가 있던 화단에 깊이 묻어 준다. 그때 한 마디 기도를 간직하며. 꼬리 아닌 가슴만으로 유영(遊泳)하기를. 거기, 멸치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바다. 그건 하나의 까만 섬으로 누워 또 한생을 해당화 꽃으로 무장무장 피워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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