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살아있다]

2존 국악을 이해하다. 난계 박연 부부영정이 전시돼 있다.
2존 국악을 이해하다. 난계 박연 부부영정이 전시돼 있다.
난계 박연(朴堧)은 1378년(고려 우왕 4년) 8월 20일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하급관리였던 박천석(朴天錫)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고 학문이 탁월했으며 잠시도 피리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피리를 불렀다. 효심이 지극한 그는 6년간 여(시)묘 살이 해 1402년(조선 태종 2년)에 조정에서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박연은 1405년(태종 5년) 28세 때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1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등과했다. 그 후 집현전 교리(敎理),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으로 있으면서 당시 세자였던 세종과 관계를 맺게 된다.

젊은 세자는 박연의 명연주에 크게 감동해 음악에 관한 문제라면 모두 그를 크게 신임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돼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 찬집(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해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년)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3년 후 다시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해 실행케 했다. 1431년 남급(南汲)·정양(鄭穰)과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채택케 하고, 조회와 회례에서 종전까지 기생이 추던 춤을 무동(舞童)으로 대치해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해 궁정 음악과 예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박연은 1433년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됐다가 용서 받아 다시 아악에 종사했으며, 공조 참의·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145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다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1453년 10월(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집현전 한림학사 이었던 박연의 셋째아들 박계우가 교형(1454년)됐으나 악학도제조인 수양대군이 악학제조인 박연은 4조(三朝)에 걸친 원로로서 3족에 멸하는 죽음을 면했다.

그는 1458년 2월까지 고산에 자원 안치되었다가 풀려나 1458년 3월 23일 서거했다.

손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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