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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춘추] 프랑스 혁명 이전에 혁명을 일군 모차르트

2017-07-17기사 편집 2017-07-17 13: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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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았던 2006년,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는 1년 내내 축제였다. 이 해 잘츠부르크 시 전체 수입의 80퍼센트 이상이 모차르트로 인해 발생했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였다.

"여전히 고통 속에 있습니다. 대주교는 세 번이나 내 안전에서 무례하게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독설로 나를 공격했습니다. 저를 비열한 놈, 방탕한 놈이라고 부르며 꺼져버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도 훼손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아버지가 참는 걸 원하시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 잘츠부르크에서의 모차르트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미 10대 초반에 우주의 이치를 깨우친 모차르트. 당시 유럽의 젊은 지식인층에게 퍼졌던 '질풍노도운동'과 '자유·평등·박애'를 표방하는 프리메이슨 사상에 깊이 관여한 모차르트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대주교는 가장 먼저 바꿔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작 평민 계급에 불과한 한 명의 음악가가 엄격한 절대왕정의 사회질서를 뒤집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는 마침내 잘츠부르크의 통치자였던 콜로레도 대주교와 결별했다.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엉덩이를 걷어차게 하는 벌을 내렸다. 모차르트는 이후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빈에 정착했다. 이제 자신을 고용한 대주교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을 위한 음악,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작곡하는 인류 최초의 음악가가 된 것이다.

물론 새장을 탈출한 모차르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배고픔과 가난뿐이었다.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가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빈의 귀족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 제국의 식민지였던 프라하에서 모차르트는 최고의 스타였다. 모차르트는 단 한 번도 제자리에 만족하거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당시 사람들에게 언제나 파격이었고 듣는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유럽사회는 '흙수저'도 '금수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프랑스 혁명보다 무려 8년이나 빨리 음악가로서 먼저 혁명을 일구었다.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 제1호'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었다. 모차르트가 있었기에 베토벤 이후 모든 음악가들은 당당히 대접받으며 살 수 있었다. 유혁준 클라라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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