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았던 2006년,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는 1년 내내 축제였다. 이 해 잘츠부르크 시 전체 수입의 80퍼센트 이상이 모차르트로 인해 발생했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였다.

"여전히 고통 속에 있습니다. 대주교는 세 번이나 내 안전에서 무례하게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독설로 나를 공격했습니다. 저를 비열한 놈, 방탕한 놈이라고 부르며 꺼져버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도 훼손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아버지가 참는 걸 원하시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 잘츠부르크에서의 모차르트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미 10대 초반에 우주의 이치를 깨우친 모차르트. 당시 유럽의 젊은 지식인층에게 퍼졌던 `질풍노도운동`과 `자유·평등·박애`를 표방하는 프리메이슨 사상에 깊이 관여한 모차르트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대주교는 가장 먼저 바꿔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작 평민 계급에 불과한 한 명의 음악가가 엄격한 절대왕정의 사회질서를 뒤집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는 마침내 잘츠부르크의 통치자였던 콜로레도 대주교와 결별했다.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엉덩이를 걷어차게 하는 벌을 내렸다. 모차르트는 이후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빈에 정착했다. 이제 자신을 고용한 대주교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을 위한 음악,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작곡하는 인류 최초의 음악가가 된 것이다.

물론 새장을 탈출한 모차르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배고픔과 가난뿐이었다.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가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빈의 귀족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 제국의 식민지였던 프라하에서 모차르트는 최고의 스타였다. 모차르트는 단 한 번도 제자리에 만족하거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당시 사람들에게 언제나 파격이었고 듣는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유럽사회는 `흙수저`도 `금수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프랑스 혁명보다 무려 8년이나 빨리 음악가로서 먼저 혁명을 일구었다.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 제1호`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었다. 모차르트가 있었기에 베토벤 이후 모든 음악가들은 당당히 대접받으며 살 수 있었다. 유혁준 클라라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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