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모 KAIST 초빙석좌교수·前 과학기술처 장관

정근모 교수가 대한민국 원자력 산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호철 기자
정근모 교수가 대한민국 원자력 산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호철 기자
"요즘 제가 외국에서 전화와 이메일을 많이 받아요. 원자력 세계 1위 국가가 원전을 폐기한다고 하니 다들 놀라고, 궁금해 하는 거죠.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

한국 원자력계의 산증인인 정근모 KAIST 초빙석좌교수(전 과학기술처 장관)가 무거운 표정으로 대한민국 원자력발전소의 미래에 대해 물을 때 인터뷰 대상자가 된 느낌이었다. 과학기술계를 상징하는 석학으로 두 차례의 장관과 대학 총장 등 다양한 일을 경험한 이 세계적 물리학자에게 탈(脫)핵·탈원전을 놓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정 교수는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에는 과학기술이라는 토대가 있었다"며 "그 핵심 중 하나가 원자력이었다. 값싼 전기로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환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배심원단 결정으로 원전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전문가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원전은 `착한 에너지`"라며 "협력업체 등 일자리와도 관련이 큰 만큼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던 지난 5일 한국원자력대학원대학교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국제 원자력계의 대부를 만났다.

- 외국의 지인들에게는 어떻게 답변하세요?

"정치적인 공약 때문에 발표한 것 같은데, 여러 단계적 토론을 거칠 거라고 말하죠. 또 우리가 법이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거다, 법에 따라서 하는 게 법치국가인데 그 단계를 밟게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 얼마 전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이 있었습니다. 소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고리 1호기는 1978년 첫 상업운전을 시작해 `한강의 기적`을 만든 주역이었죠. 2007년에 설계수명 30년이 다했지만 10년 더 연장해 잘 쓴 거죠. 우리가 원전을 하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과학기술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철학이 확실했던 분이었죠. 철저한 정책 개념을 만들었고, 실천했습니다. 실력을 기르겠다, 그래서 1959년 원자력위원회를 만들 때 문교부 장관 출신을 위원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어요. 결국 고리 1호기도 그런 토대를 바탕으로 탄생했던 겁니다."

- 원전에 그토록 절박하게 매달린 이유가 뭡니까?

"값싼 에너지니까. 우리가 오일이 있습니까, 가스가 있습니까? 이 대통령이 원자력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고, 60년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였던 시절 `용감한 결정`을 했어요. 70년대 오일쇼크를 겪은 뒤 원전 산업을 가속화했는데 국제 입찰에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사를 선정해 고리 1호기를 지었죠. 원천 기술 이전을 약속한 게 높은 점수를 받았고, 그 뒤 국산 원전 자립과 수출로 이어지진 계기가 된 겁니다."

- 그런데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계획 백지화와 기존 원전 설계수명 연장 불허 방침입니다.

"원자력은 전문성이 대단히 중요하죠. 신고리 5·6호기도 부지 선정부터 설계에 이르기까지 안전성, 안전성에 초점을 맞춰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사업이 28.8% 진행됐고 1조 6000억 원이 투자됐어요. 이런 국가적 사업이 완료되면 수십 년을 쓸 수 있어요. 원자력에 대해 배워야 되는 배심원단의 결정에 운명을 맡기겠다는 건데 그리 간단하지 않아요. 원전 정책을 심사숙고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입니다."

- 세계적인 추세가 원전 폐기 쪽 아닌가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도 있었고요.

"건설 중인 원전이 60기 정도고, 500기 가까이 운전 중에 있어요.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드는데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후쿠시마 사태로 사망자가 많이 나왔는데 해일로 문제가 생긴 거지 지진 때문이 아니었어요. 진원에서 가장 가까운 오나카와 발전소는 문제가 없었죠. 원전 설계의 핵심인 내진 설계가 완벽했기 때문이에요. 경주 지진 때문에 원전에 이상이 있지는 않았잖아요."

- 그렇지만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여전합니다.

"비행기를 예로 들어 볼까요. 설계에서부터 운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완전히 안전 위주로 만드는 거죠. 비행기 타면서 걱정 안 하시죠? 원전은 안전성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설계, 건설, 운영, 운전 같은 모든 과정을 안전하게, 정말 퍼펙트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해요."

-`안전`을 알리기 위한 원자력업계의 노력이 부족했던 게 사실 아닙니까?

"정확한 정보 제공에 나섰어야죠. 원자력계의 전문가들이 쉬운 말로 일반 국민에게 설명해 따라오도록 그거 못한 건 업무 다 못한 거라고 제가 강조합니다. 그래서 언론기관의 역할이 중요해요. 정확한 정보를 국민이 알아야 올바른 바탕 위에 서 있지 않은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거든요."

- 신재생 에너지를 대안으로 언급하곤 하는 데요.

"우리나라가 에너지를 95% 수입하고 있어요. 태양열은 밤에 안 되고, 풍력은 바람이 없으면 못하죠. 당장 전기료를 어쩝니까. 산업 경쟁력은요. 대체 에너지원의 기저에 원자력이 필요합니다. 첨단 신재생 에너지 하고 잘 믹스를 해야죠."

- 세계적 응용물리학자이신데 특별히 원자력 안전 분야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1978년도에 미국에서 스리마일 사고가 있었어요. 뉴욕공대 교수로 있는데 미 정부가 과학재단에 와서 원자력정책팀장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원전정책을 총리뷰 하는 걸 총괄하면서 백안관에 보고하곤 했는 데 결론은 `안전문화`였죠, 원전의 키는 안전이다, 원전 산업에 종사하는 고급기술자들에게 철저한 교육을 시키는 센터를 만들었고, 안전문화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었죠. 원전 설계할 때는 7중 안전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원자로 표준화 논문을 썼는 데 미국 시장경쟁체제에서는 받아 들이기 어려운 개념이었어요."

정 교수의 논문은 제 3세대 원자로 개발의 뿌리가 됐다. 논문을 본 우리 정부가 한국에 적용을 추진했고, 정 교수는 1982년 한전기술주식회사 사장을 맡아 원전 설계 표준화를 지휘했다. 대한민국 원전은 이런 과정을 거쳐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

- 우리나라의 원자력산업 수준은 세계에서 어느 정도 입니까?

"1등이에요. 현재 전 세계 약 30개 국이 원전 건설하려고 하죠. 종주국인 영국에서 우리 보고 지어달라고 장관도 왔다 가고, 미국도 합작하자고 하고 그래요. 영국은 과학기술의 종주국이지만 섬나라라 전기를 사오기가 어려워요. 자급자족해야죠. 원전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또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케냐 원전 짓는 데 중견기술자 훈련시키고 있어요. 우리나라가 두뇌산업, 과학기술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요. 국민들이 더 후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그렇게 가야 하지 않을까 해요. 비가 온 다음에 더 단단해진다는 데 원전산업이 그랬으면 합니다."

2009년 한국이 총 400억 달러(약 47조 원)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에는 정 교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규모가 단군 이래 최대일 뿐 아니라 최근 세계시장에서 발주된 플랜트 프로젝트 중 최대인 대사건이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1978년 원전 1호기를 건설한 이후 31년 만에 한국형 원전 첫 수출이라는 기록을 쓴다.

"2008년 UAE가 석유 고갈에 대비해 원전 개발에 나섰어요. 워싱턴에서 제게 도와줄 수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UAE가 미국 측에 타당성 보고를 맡겼고, 저와 제 3세대 원자로 개발에서 손을 잡았던 미국의 엔지니어들이 한국을 신뢰했죠. 그래서 제가 우리는 안전성을 최고로 설계된 제 3세대 원자력을 갖고 있어 경쟁하면 틀림없이 이긴다고 했습니다. 저도 한전 고문을 맡아 뛰었고요. 수주를 자신하던 프랑스에 비상이 걸려 사르코지 대통령이 군사기지 건설 제공 같은 당근을 내밀었지만 결국 우리가 사업을 따내게 된 거죠."

정 교수의 회고는 이어진다. "60년간 원전 가동비, 운영, 정비를 맡는 프로젝트입니다. 공급업체 인력이 백업을 해줘야 해요. 그걸 원자력생태계라고 하는 데 우리처럼 탄탄한 나라가 없어요. 요즘 일자리가 중요하다는데 원자력산업은 이미 갖추고 있어요. 이미 고지에 올라선 산업으로 세계를 이끌고 있잖아요. 정책 결정자들이 다시 한번 숙고해야지, 다 따놓은 거 흐트러트리면 어떡 허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의장으로도 활동하셨는데요.

"우리나라가 IAEA 창립에 주도적으로 나선 걸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것예요. 1957년 발족됐는데 당시 남북이 갈라져 있어 유엔 가입이 안되는 상황이었어요. 벌써 창설 60년이 됐네요. 제가 1989년 의장으로 있었는 데 아마 국제기구 첫 한국인 수장이었을 거예요. 이런 게 다 우리 원자력 산업의 위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어요?"

- 북한이 어제 ICBM을 발사했습니다.

"우리는 원자력을 참 착하게 활용해왔지요. 선한 에너지로 만들었어요. 북한은 정반대로 가고 있으니. 사실 더 무서운 건 생화학무기예요. 인륜에도 벗어나는 일인데…."

- 대덕연구단지 준공 때 장관을 하셨죠?

"충청도는 아버지 고향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죠. 제가 첫 장관으로 있을 때인 1992년에 대덕연구단지 준공식을 가졌고, 그전에는 서울 태릉에 있던 KAIST를 대전으로 이전하는데 역할을 했고요. 항공산업 육성을 위해 항공우주연구소에 파격적으로 지원했어요. 저는 정말 감사 드리는 게 많아요. 행복한 세대였고요. 그 당시 무에서 나라를 일구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지도자들이 미래 비전을 일깨워주시고, 최선을 다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주셔서 감사 드리죠. 그래서 카이스트 강의도 하는 거예요."

- 충청인들에게 인사말을 하신다면?

"충청도 분들이 의외로 재주가 있어요. 학자들 중 충청도 사람 굉장히 많죠. 대한민국 중심도시인 세종시가 있고, 과학기술이 21세기 핵심인데 대덕특구가 자리 잡고 있잖아요. 선거는 인구가 적어서 안 된다고 하지만 미래 한국의 핵심요소를 다 갖추고 있죠. 한국을 넘어 아시아, 전세계를 바라보는 비전과 꿈을 충청도분들이 가졌으면 해요. 대담=송신용 대기자 겸 논설위원

한국원자력계 산증인 20년간 해비타트 헌신

정교수는

정근모 KAIST 초빙석좌교수의 직함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걸 보면 노(老)과학자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교수`라는 직함으로 불리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며 그렇게 호칭해달라고 할 정도로 2세 교육에 관심이 높다.

정 교수는 수재 중 수재로 불렸다. 경기고교 1년을 마친 뒤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 19세 때 졸업했다. 불과 23세 때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응용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플로리다대학교 조교수와 프린스턴대 핵융합연구소, MIT 핵공학과 연구교수를 거쳐 뉴욕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 등을 역임했다.

1971년 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IAS) 설립이후 초대 부원장 겸 전자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0년과 1994-1996년 두 차례에 걸쳐 과학기술처 장관(제12·15대)을 지냈다. IAEA 총회의장과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고등기술연구원 초대 및 2대 원장, 한국과학기술 한림원장 등 국내외 핵심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력 중에는 호서대 총장과 명지대 총장도 있다.

약관의 나이에 원자력원구소 원장보좌역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원자력과 일심동체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전 고문으로 세 번째 재임 중이고, UAE 원자력자문위원 등 해외 원자력계를 돕는 활동을 병행한다.

충청과의 인연도 깊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가 충남 보령시 녹도와 내항리에서 터전을 일구었고, 교육자인 아버지가 근무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90년 안면도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사태 때는 강영훈 국무총리의 만류에도 도의적 이유를 들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유명하다. 2004년부터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과 고문으로 봉사하고 있다. 한국 사랑의 집 짓기 운동 연합회인 해비타트 이사장으로 20년을 헌신했고, 현재 명예이사장으로 있다.

미국과학재단 특별공로상과 은탑산업훈장, 청조근정훈장, 세계원자력한림원상, 한국원자력 대상 수상은 정 교수가 과학기술계에 기여한 공로를 보여주기 충분하다. `한국 21세기-오늘의 문제와 내일의 과제`와 `일어나라 대한민국`,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찬이 되고 싶다` 등 수십 권의 한·영문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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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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