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반드시 읽고 마음깊이 새겨야 할 글이기에 소개한다.

1636년, 청나라 15만 군사는 강물이 어는 시점을 골라 청천강과 대동강을 건너 밀려온다. "국왕이 도성을 버린 일이 만고에 없는 일은 아니니" 급히 피난을 가야 한다고 신하들은 왕에게 간언하고, 왕은 시체를 내가는 문을 통해 궁궐을 빠져나온다. 왕의 피난행렬은 얼어붙은 송파나루를 건너 새벽녘에 남한산성에 들게 된다. 얼마나 허둥지둥 댔던지 왕의 손발이 동상에 걸렸다.

이틀 뒤 청의 주력부대도 송파나루를 건너 삼전도 들판에 진을 펼친다. 이로써 춥고 가난한 남한산성에서 왕과 백성은 한 달 보름간 시련을 겪게 된다. 1636년 병자년에 일어난 국난이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성첩을 지키는 군병들은 보리밥 한 그릇에 간장 물을 마셔 허기를 달래고, 땔감이 없어 말먹이를 태우고, 헐린 초가지붕이 말먹이가 된다. 성위에 방패가 모자라 사찰의 마룻바닥을 뜯자는 논의가 일고, 성안의 개들은 잡아먹혀 개 짖는 소리가 멎었다. 땔나무를 장만하느라 군병들이 환도로 나뭇가지를 쳐서 칼의 이가 빠지고 날이 비틀렸다. 성내에 먹을 것이 얼마나 귀했으면 석빙고에서 찾은 밴댕이젓 한 독도 왕의 의중을 물어 배분했다. 임금 수라상에 졸인 닭다리 두 개가 오르던 다음날부터 성안에 닭 울음소리도 끊겼다.

해가 바뀌자, 수라간 상궁은 달걀을 풀고 맑은 간장으로 간을 맞춘 떡국을 왕에게 올리고, 왕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북경을 향해 명나라 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망궐례를 올린다. 이 광경을 남한산성이 내려다보이는 망월봉 꼭대기에서 관망하던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왕이 제 발로 걸어 나올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갈 날을 대비한다.

강화도로 피신했던 가족들이 청군에 잡혀오고,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다"고 주청하는 주화론자들의 뜻과 성안 백성들의 암묵적 동의로 왕 일행은 남한산성에서 출성한다. 황금색 양산이 펄럭이는 삼전도에서 조선왕은 구층 단 위에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한다. 조선왕이 절하는 중에 태종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로 오줌을 갈겨 또 다시 모욕을 준다.

김훈의 `남한산성` 속 설정된 인물 중에서 대장장이 서날쇠의 역할은 매우 인상적이다. 능동적으로 전문성을 발휘하고, 창의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감당하는 모습은 도리와 책무를 다하는 모범시민의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쇠를 담금질하여 농기구와 병기를 만들고, 화약을 제조하여 관아에 납품하고, 농사지을 때 비료로 사용하려고 항아리를 묻어 인분을 삭히고, 망가진 조총이나 병기를 고친다. 성 위에 눈비를 가리려 가림막을 만드는데 무명 다섯 겹을 뚫을 수 있는 대바늘도 고안해내고, 파쇠를 녹여 톱을 만들어 도끼보다 더 효율적으로 땔나무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준다.

기틀이 흔들리는 위기의 나라는 품계도 없는 대장장이를 구원병을 부르는 격서의 전달자로 선발하여 위험의 상황으로 내몰지만 서날쇠는 그 소임을 완수한다.

`남한산성`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불문가지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위기가 닥쳤을 때는 잃을 것을 전제로 수습책이 강구되기 마련이므로 그 때는 많이 늦은 것이다.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위기 대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여러 상황들을 톱아 볼 수 있는 예지력의 겸비다. 시민들 또한 평화기에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반드시 의무로 보답해야 한다. 성장 동력이 떨어져 나라가 힘겨워할 때는 수없이 많은 서날쇠들의 집단지성의 힘이 동력이 된다. 성 안과 밖의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척화론자와 주화론자의 논의로 얻은 결과가 왕과 백성에게 치욕만 안긴 것이었고, 그 논의의 결과가 260여 년 후에 벌어진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의 치욕 또한 방비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 논의의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세상 도처에는 수많은 서날쇠들이 있다. 맹주완 아산문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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