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석 전 전민초 교장
김영석 전 전민초 교장
`장미꽃은 5월에 붉은색을 토하고 6월엔 향기를 뿜는다`는 말이 있다. 40년 만의 가뭄 탓에 햇볕 잘 드는 담장이나 투명 펜스에 온몸을 맡긴 채 더위에 지친 장미가 태양보다 더 붉은 잎을 토하며 향기는 뿜을 기력이 없어 보이는 6월이다.

`장미와 두 사내` 이야기가 있다. 한 사내가 길을 가다가 활짝 핀 장미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장미꽃을 들여다보던 사내는 투덜거렸다. "아니, 장미 나무에 웬 가시가 이렇게 많은 거야. 만약 가시만 없다면 예쁜 장미꽃을 얼마든지 만질 수 있고, 쉽게 꺾어 집에 가져다 꽃병에 꽂을 수도 있을 텐데…" 얼마 후 다른 사내가 같은 길을 걷다가 장미꽃 앞에 멈춰 서서 잠시 장미꽃을 바라보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에, 가시나무에 웬 장미꽃을 이렇게 붙여놓았지? 장미꽃이 없었으면 그냥 가시나무이었을 텐데…" 주위에 지천인 장미를 보면서 줄기의 가시만을 보고 속 좁은 탓만 넋두리를 한 내 삶이 겸연쩍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방 한켠에 쌓아 두었던 책 보따리 하나를 정리하다가 읽지 않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읽으려 사 놓고 한쪽에 밀쳐뒀다 정리하며 눈에 띤 것이 고마워서 하던 일 제쳐두고 앉은 자리에서 삼매경에 빠졌다. 아내에게 분명 한마디 들을 줄 알았는데 커피 한 잔에 배시시 눈웃음까지 보내며 "편안하게 읽으세요"라는 속 넓은 배려에 나는 행복한 리스본여행을 재촉할 수 있었다.

파스칼 메르시어가 중년의 교수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기이한 우연을 거쳐 손에 들어온 한 포르투갈 작가의 책 머리말이 주인공의 마음을 홀리게 됐고 마침내 그레고리우스는 마법 같은 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시계처럼 철저했던 자신의 일상을 내버려 둔 채 불현듯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에 올랐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이러한 여행을 시작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것이 메마름에 자족하는 것을 멈추고 충만한 삶을 향한 갈망이었음을 그레고리우스는 깨닫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나도 어디론가 쉽게 떠날 수 있다면… 그런데 걸리는 게 너무 많아 그저 허공에 눈웃음만 날렸다. 내게도 파스칼 메르시어가 의미하는 리스본은 있는지, 나의 리스본은 어디일까? 나 자신은 지금 어느 곳에 있고, 거기에 나는 허상(虛像)인지 아니면 실상(實像)인지… 나의 일상에서 익숙함 대신 낯설음을 느끼며 지금까지 바라고 행했던 것들이 의미 있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생각의 깊이는 자신을 무겁게 짓누를 때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자문자답(自問自答)의 결과를 얻기도 한다.

한 권의 책 과 한 장의 열차 티켓으로 시작된 마법 같은 여행을 마치고 긴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나의 리스본은 어디인지 그리고 그로 인한 기쁨의 순간들로 빛나는 내 삶의 자리가 어디였는가를 찾는 일상이 나만의 리스본을 향해 끊임없는 여행을 해 왔고 오늘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이유라 생각 든다.

여행은 경관(景觀)에 흠뻑 빠지는 보는 즐거움보다 스치는 사람들 간에 맺어지는 이런저런 인연이 참 맛이다. 그래서 첫 인연은 하늘이 주시고 두 번째 인연부터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인연이라고… 그날그날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은 분명 나이다. 다른 맛과 멋스러움이 덤으로 주어진 새 날의 주인공은 나(我)다.

몇 해 전 행복해지는 열 가지 방법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야기했다. 관대해져라, 느리게 살아라, 밥 먹을 때 TV 끄고 대화하라,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쉬어라. 그 중 맨 앞 `Live and let live`가 마음을 끌어당겼다. `내 방식대로 살되 남이 사는 방식도 상관하지 말라`는 교황의 말씀은 남의 말과 생각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이면 개인도 세상도 많이 행복해 질 것이라는 방법 제시가 아니었을까?

나는 매일 떠난다. 새 날 새 인연을 찾아 내가 있는 이 터(域)에서 끝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파스칼 메르시어가 의미하는 곳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나와 우리들의 행복한 리스본에서. 김영석 전 전민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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