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에 있어 아주 흔히 논의되는 용어 중의 하나로 증명책임 또는 입증책임이라는 것이 있다. 재판의 전제가 되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그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 왜 여기에 책임이라는 부담을 지우는 것일까.

재판이라는 것은 결국 과거에 어떠한 사실이 있었는지를 확정하고 여기에 적용될 법이 어떠한 내용인가를 선언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사람의 인지 능력이나 입증자료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법관이 아무리 재판에 공을 들인다 하더라도 사실인정조차 하기 어려운 경우가 실제로 적지 않다.

필자도 법률가로서 20년 넘게, 특히 그 중 상당 기간에 걸쳐 법관으로서 재판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지만 사실인정에 관한 한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점으로 돌아가 곁에서 당시 상황을 목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황당한 상상을 한 경험도 있는데, 이는 실체적 진실과 괴리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관계가 완전히 증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결을 거부하거나 마냥 미뤄둘 수도 없다. 이러한 경우 법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결국 증명책임이라는 제도를 낳은 것이다.

증명책임이란 것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재판에서 쟁점이 되는 사실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가 확정되지 않을 때 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돼 이를 전제로 판결을 받게 되는 위험 또는 불이익을 가리킨다. 증명책임은 재판의 최종 단계에 이를 때까지도 당사자의 사실에 관한 주장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누가 불이익을 받게 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대여금 사건의 예를 들자면 갑이 을에게 돈을 대여했으니 갚을 것을 명해달라고 청구하고 을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건에서 대여했다는 주장이 진실인지 여부가 불명할 때에는 대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를 증명할 원고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게 된다. 반면 위 사건에서 을이 차용한 것은 맞으나 이미 갚았다고 주장할 경우 변제를 입증하지 못하는 한 입증책임이 있는 자로서 을은 패소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 증명책임이란 결국 패소를 면하기 위해 증거를 제출할 책임이 되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황에 따라 입증책임을 갑이 지기도 하고 을이 지기도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를 입증책임의 분배라고 한다. 입증책임의 분배 원칙에 따른 책임의 소재는 민사재판에 있어 결정적인 방향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법관이 입증책임의 소재를 잘못 정하게 되면 재판의 결과가 정반대로 나오게 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입증책임의 분배 문제는 법령의 해석 적용과 판례의 조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당사자들은 재판과정에서 법원이 알아서 사실관계를 파악해서 진실을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법관이 신이 아닌 이상 증거관계가 불명하거나 불충분함에도 심증이 간다는 이유로 증거를 초월해서 판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일상적인 법률관계에 있어서도 객관적인 증거자료를 잘 구비해 보관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최지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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