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오디세이] 31 김재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장

김재실 회장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삶과 정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재실 회장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삶과 정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가 한민족의 2대 인물로 숭배한 인물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민족의 스승`으로 불리는 도산의 진실 정신과 통합의 리더십은 21세기에도 우리에게 절실한 덕목으로 다가온다. 김재실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50년 이상 도산 정신을 실천하고 알리는데 몸 바쳐왔다. 김 회장은 "도산 선생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요, 정치지도자이면서 교육가요, 독립운동가다"라며 "선생의 진실과 통합 정신은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고 강조했다.

- 먼저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해 설명해달라.

"선생은 1878년 11월 평안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했고, 언더우드 학교에서 수학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국민을 계몽하는 웅변으로 명성을 떨쳤고, 민족지들을 지원하는 데 적극 나섰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 재미동포의 단결과 교민 계몽 운동을 전개한 것도 선생이었다. 나라를 빼앗길 위기가 닥치자 귀국한 뒤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립해 국민 교육과 조직화 운동을 전개했다. 한일합방이 되자 미국으로 망명,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해 민족운동에 매진할 인재를 모으고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5월 상해로 옮겨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독립운동 방략 수립에 매진했다. 또 미국과 상해를 오가며 대독립당 결성 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 도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 정신이다. 참 되자는 것이다.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이 아니라 거짓 때문이라고 하셨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다. 그 다음으로 통합의 리더십이다. 지방색이나 공리공론으로 분열됐던 우리 민족과 사회를 어떻게든 통합하려고 애썼다."

- 요즘 정치지도자들이 들으면 뜨끔할 것 같다.

"모든 사태가 어지럽고 혼란스런 건 우리 사회에 거짓이 팽배해 있기 때문 아닌가. 국가의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니 도산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크게 질책했을 게 틀림없다. 아울러 통합의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상해임시정부에서 급진론과 점진론을 통합하려 한 게 대표적이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자리에서 노동국 총판(차관급)으로 내려온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흥사단을 조직할 땐 단장이나 대표를 하지 않고 8도 대표로 창립했다. 전국을 통합하려 한 의지였다. 시사하는 바 크다."

- 회장(이사장)과 기념관장을 맡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1963년 대학 1학년 때였다. 도산 서거 25주년 추모식장에 걸린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는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흥사단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에 뛰어 들었다. 전국에 아카데미를 조직하기 위해 숭실대 안병욱 교수님을 모시고 순회강연을 하고, 흥사단 기관지인 `기러기` 잡지를 편집하고, 고교생 아카데미를 지도했다. 사회인이 되어서는 흥사단 이사원·공의원의 간부로 참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사·부회장으로 일하다가 지난 2월 회장으로 피선돼 큰 책임을 맡았다. 1947년 사업회 출범 이래 신익희 선생이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처럼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높으신 분들이 이끌어 왔는 데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제가 회장이 돼 송구스럽고, 두려움이 앞선다."

- 활동해오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은?

"도산 선생의 묘소가 서울 망우리 산꼭대기에 있었는 데 1973년에 도산공원으로 이장한 게 가장 먼저 떠오른다. 1998년 도산기념관 건립에 참여한 것도 보람찬 일이었다."

- 기념사업회와 기념관에서 하고 있는 주요 사업은?

"해마다 3월 10일 추모식을 거행한다. 기념관에는 도산의 유품과 서신·사진 같은 기록물, 연구서적을 전시 중이다. 연중무휴 개관하는 데 하루 200명 정도가 찾아온다. 도산학회를 조직해 도산 사상에 대한 논문집을 내고 있고, 연설문이나 서신 등을 발간해왔다. `도산과 사진, 그리고 역사` 특별전을 상시 운영하면서 `도산과 민족 수난기 지도자들`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 특히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전개하는 이유는?

"도산 정신을 2세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취지다. 애기애타(愛己愛他·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 인성 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매년 2000명이 넘게 참여한다. 글짓기 공모를 매년 실시해 선생 탄신일(11월 3일)에 시상식을 한다."

- 미국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준비 중인데.

"미국은 도산 선생이 교포계몽사업과 독립운동을 하신 곳이어서 연관이 많다. 매년 1회 학술세미나를 개최해 왔는 데 7월에 `미주 한인사회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도산 안창호`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 예정이다."

- 도산은 충청권과도 인연이 많지 않나?

"떼려야 뗄 수 없다. 임정요인이신 이동녕 선생(천안 목천)이나 조병옥 박사(천안 병천)와 인연이 깊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예산)의 폭탄투척의거 뒤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고, 국내로 압송돼 대전형무소에서 2년 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도산 선생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흥사단 대전지부 회원은 600명이 넘는다. 기념사업회에도 많은 분들이 참여 중이다."

- `도산의 희망편지`가 관심이다. 어떻게 구상했나?

"지난해 3월 10일 선생 서거 78주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했다.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도산의 말씀 중 한 구절씩 선정해 매주 목요일에 전자우편으로 보낸다. 도산은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나라가 죽는다`라고 했다. 약 2만 명에게 띄우고 있는 데 받아보고 싶은 분들은 언제라도 연락하면 된다. 기회가 되는 대로 모아서 소책자로 발간할 계획이다."

- 사업회와 기념관 운영에 어려움이 적지 않을 텐데 재원 충당 같은 방안은?

"쉬운 일이 어디 있겠나. 사명감으로 하고 있다. 다행히 기념관을 신축한 뒤 서울 강남구청에 기부 체납해 기본관리비를 받고 있고, 국가보훈처의 보조와 임원들의 회비로 충당하고 있다. 뜻 있는 분들이 함께 참여해 도산 선생의 정신을 청소년들에게 알려 애국심을 길러 주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고, 길이 있으면 앞으로 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운동을 펼치고 있다."

- 도산의 활동상을 바탕으로 충청의 젊은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해 달라.

"충청은 충절의 고장으로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국난에 처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바친 선열들의 고향이다. 이순신 장군과 류관순, 김좌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분들이 충청 출신이라는데 자부심을 갖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끝까지 이어갔으면 한다."

- 동양시멘트 상임감사 등 사회 활동을 폭넓게 하는 비결이 궁금하다.

"사실 고희를 넘긴 지 몇 년 됐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지. 실력도, 재주도 없지만 어디에 있든 도산 정신으로 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생은 참으로 성실하고 매사를 철저히 챙기면서도 크게 생각하신 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산의 생활 태도를 닮아보려고 노력한 결과일까."

- 고향에는 자주 가나?

"1년에 서너 번은 간다. 어르신들이 떠나시면서 요즘은 다소 뜸하다. 지난 5월에는 사촌·육촌 형제들과 천안에서 등산을 했다. 그런 기회를 자주 만들 생각이다."

- 충청인들에게 인사말을 한다면?

"저는 충청인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럽다.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지 않나. 누구는 느리다고 하는 데 경거망동하지 않고 신중하며 한번 마음 먹으면 변치 않는 그 충절을 우리 스스로 닦고 지켜나갔으면 한다." 대담=송신용 대기자 겸 논설위원

중국 무역연구 국제통 명성 경제 개발 계획 수립 기여

김재실회장은

충남 천안(동면 광덕리)이 고향으로 병천중학교를 거쳐 서울로 유학했다. 서울대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서울대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과 최고경영전략과정(ASP)을 1기로 수료했다. 고려대 정책대학원 부동산금융과정과 중앙일보 최고경영자과정(J포럼)을 마친 학구파다.

한때 신문기자가 꿈이었고 유수한 신문사에서 불렀지만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동생 여섯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기 때문이다. 군 입대 뒤에도 월급을 주는 한국산업은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사부 과장과 종합기획부 차장, 국제금융부장, 총재비서실장, 자금부장, 부총재보(이사) 같은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산은 최초의 해외지점인 도쿄지점 개설 주역이기도 하다. 한·중 수교 훨씬 이전인 1970년대부터 중국의 경제 체제 및 무역 관계를 연구해온 국제통으로 유명하다.

2000년부터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4년간 활약했고,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과 대통령 자문 동북아경제추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러 기업에서 그의 능력과 경륜이 절실했던 모양이다. 대아건설 감사와 경남기업 관리총괄 사장, 성신양회 대표이사 사장, 대우증권그린코리아기업인수목적회사(SPAC) 회장, 태강코퍼레이션 고문으로 일하다가 현재 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 상임감사로 있다.

산은 재직 시 경제개발관련 통계 자료 수집·분석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정부의 외자 도입 정책에도 참여했다. 특히 중소기업본부장으로 재임하며 중소기업 및 벤처산업 육성과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의 구조조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능력을 발휘했다.

본연의 업무 이외에도 대학 강의와 사회 봉사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숭실대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경제통계학`, `경제수학`, `경영정책` 등을 강의했다. 대학 재학 중 도시 빈민 미취학 아동을 위해 청영고등공민학교(야학)를 설립·운영했고, 흥사단 이외에 `나라발전연구회` 총무 등 이력에서 보듯 다양한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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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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