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의전(儀典)은 그 시대와 나라의 사회문화적 관습과 상징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사회 사람들 사이의 상이한 의례는 갈등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상대의 사회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전에 합의가 필요한 이유다. 구성원 간에 온전하게 합의되지 않은 의전의 요구는 불신과 대립을 낳고 심각한 파국을 초래하는 경우까지 있다. 로마의 역사가 아리아노스(95-175)가 쓴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에는 알렉산드로스(BC 356-323)가 부하들에게 요구한 색다른 궁중 의례가 친구의 목숨을 앗는 참극을 만든 예가 실렸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원정에 나서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인 박트리아까지 굴복시켰다. 알렉산드로스는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후 그리스 민족과 페르시아 민족 간의 융합정책을 펼쳤다. 그는 페르시아 복식과 음식 문화를 차용하고, 그리스 장졸과 페르시아 및 박트리아 처녀들 간의 결혼을 거국적으로 추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몸소 모범을 보였고, 합동결혼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는 등 결혼 장려를 통한 민족 동화정책을 추구했다. 자연히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졌다. 마케도니아인들이 중심이 된 그리스 장졸들은 페르시아 문화의 지나친 존중 때문에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이 훼손된다고 불만을 가졌다. 그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이 자신을 만날 때 페르시아 식의 궁중 배알 의례를 할 것을 요구했다. 즉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는 궤배례 풍습을 따르게 했던 것이다.

이는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누구보다도 자유를 사랑하는 그리스인들은 왕에게도 절대 무릎을 꿇지 않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서서 뺨 인사를 하는 관습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인들에게 궤배례는 왕과 다스림을 받는 피지배자인 신민(臣民) 사이에나 존재하는 야만적인 풍습으로 치부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영웅적 원정 활동을 역사로 남기기 위해 참전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칼리스테네스는 술자리에서 궤배례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이를 따를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는 "인간에게 과도하고 터무니없는 경의를 표하여 그 사람이 실제보다 더 훌륭해 보이도록 해서는 안 된다"며 이방인의 야만적 풍습을 자유민인 그리스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궤배례를 굴종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주장에 알렉산드로스는 분개했지만 많은 마케도니아 장졸들은 크게 공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눈치를 살핀 몇 몇 장군들이 술을 돌리며 궤배례를 하자 많은 이들이 따라했다. 이에 동조하지 않은 칼리스테네스는 미운 털이 박혔는지 얼마 후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 사례는 상이한 가치관과 관습을 지닌 사람들이 색다른 의전을 접하며 겪은 문화적 충격과 갈등을 잘 보여준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오만과 과시욕, 아무리 옳은 지적이라도 신중하지 못했던 칼리스테네스의 무례한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겹쳐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적절하지 못한 의전과 의례가 사람들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크게 훼손할 수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부의 4강 외교에 나선 특사들이 겪은 굴욕적 의전의 사례도 똑똑히 기억한다. 한 국가의 원수인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특사는 국빈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게 국제관례다. 그러나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우리 특사를 자기 부하를 다루듯 하석에 배치한 채 대담했고, 일본의 아베 총리는 특사보다 명백하게 우월함을 과시하는 좌석에 앉아 응대했다. 미국의 트럼프 역시 자신은 앉은 채 특사를 세워놓고 홀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무례한 의전은 접견의 형식과 내용을 미리 점검하고 조율하지 못한 외교 실무 능력의 부재 차원을 넘는다. 대등한 독립국가의 특사를 맞이한 그들의 오만한 의전은 우리 외교 정책 지향에 대한 불만과 경고의 우회적 표현은 아닐까. 홀대와 굴욕을 당하게 된 원인을 혹 우리가 제공하지는 않았는지 되짚어볼 일이다.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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