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 머릿글자로 조합한 단어 가운데 올해 상반기 신문 지면에서 가장 많이 쓰인 말 중 하나는 AI일 것이다. AI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알파벳 머릿글자여서, 부연설명이 없거나 이를 대신하는 우리말을 붙이지 않으면 지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세 알아차리기 어렵다. AI는 보통 조류인플루엔자를 뜻하는 Avian Influenza(에이비언 인플루엔자)의 머릿글자이거나, 아니면 Artificial Intelligence(아티피셜 인텔리전스)의 머릿글자 둘 중 하나다. 후자는 인공지능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다.

작년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대국을 가진데 이어 올해 중국 프로바둑기사 커제 9단과 바둑 대결을 벌여 연파한 알파고 때문에 단박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갖게 된 인공지능 AI가 전문직을 포함한 일자리 잠식 예고를 상징하는, 아직은 본격화되지 않은 미래의 공포를 의미한다면, 조류인플루엔자 AI는 모든 이는 아니어도 상당한 주민들에게는 이미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가 됐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AI가 이달 초 전북 군산과 제주에서 확인되더니 전국적으로 퍼지는 모양새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만 발생하는 줄로만 알았던 AI가 막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여름철에도 발병해버리니, 상식화된 고정관념을 깨는 사례 중 하나가 됐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철새도, 여름철새도 본격적으로 이동하는 시기는 아니지 않은가. 그동안 대부분 AI 발병의 주범이 철새인 것처럼 몰아갔기에, 철새가 날아다녀야만 AI가 발생하는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닌 것 같다.

철새가 전적으로 AI의 주범은 아니었다는 추론도 가능해진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통계는 아니지만 AI의 발생원인 중 절반이 조금 넘는 부분을 사람·차량 등이 차지했다는 점을 인용한 보도도 최근 나왔다. 방역기준, 위생기준을 철저하게 지키지 않은 사람의 탓이 절반은 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조금 과장하면 그동안 AI 발생·확산의 죄를 철새에게만 덮어 씌웠던 셈이다. 철새가 감당해야 할 혐의는 실제로는 절반가량으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 전문가들은 조류인플루엔자 AI가 이미 국내에서 토착화되었을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이게 좀 두려운 게, 고병원성 AI는 인수공통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인수공통이라는 말은, 동물은 물론 사람도 함께 걸리는 질병이라는 뜻이어서 그렇다. AI에 걸려 사람이 죽은 사례를 동남아시아나 중국 서부 등지에서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동남아, 중국 서부 오지 등에서는 집안에서 가축과 함께 지내는 문화, 전통이 있어서 이렇게 된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집에서 직접 생닭·오리를 잡아 음식으로 먹는 경향은 사라진 지 오래됐다. 하지만 직업상 농장에서 닭·오리 등을 항상 접촉해야 사람들이 있고, 이들도 퇴근을 하면 외부에 나와 개인생활을 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확산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국내 토착화에 따른 재앙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돼지처럼 발굽을 가진 동물만 걸리는 구제역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AI는 초래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축산 정책이나 산업구조는 누구나 싼값에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이어져 왔다. 과거 여염집에서 늘상 고기를 먹는 것은 엄두도 못 내던 시기가 있었던 한을 풀려고 이런 방향으로 온 듯한데, 생산 농가·농장들은 되도록 생산비용을 줄이기 위해 밀식사육을 하는 게 일반화됐고 고착화됐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우리에 갇혀 생애 내내 새끼만 낳도록 강요당하는 돼지, A4용지 한 장만도 못한 케이지에서 움직여야 하는 암탉이 이를 상징한다. 정책과 구조가 이런 방향으로 돼 있으니 제약업체 등에서도 싼값에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시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유행병이 돌아도 건강한 사람, 적절한 운동을 하는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꼼짝 못하게 만든 가축들을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게만 한다면 AI가 토착화됐더라도 병에 걸리는 비율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일부 사육농가들은 이미 이를 실천해 바람직한 길임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이들 사육농가들은 손실이 크다고 호소하지도 않는다. 농가와 정책담당자들이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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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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