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의 길이를 잴 때 쓰는 도구로 대나무자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 자막대기 혹은 대막대기로 된 자를 잘 쓰지는 않는다. 대나무는 그 성질이 그나마 온도에 따른 수축과 팽창이 다른 재료에 비해 덜해 자의 재료로 사용됐다. 이것이 점차 발전해 쇠나 플라스틱으로 간편하게 자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초등학교시절 이 대나무로 된 자막대기는 길이를 재는 도구 보다는 체벌용 매로 내 기억 속에는 더 남아있다. 특히 `저승사자`란 별명의 선생님이 들고 있던 노란색의 자막대기는 우리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란 잣대는 졸고 있던 학우들의 뒤통수에 여지없이 꽂혔다. 이것의 평평한 면으로 뒤통수에 날아오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간혹 뾰족한 날 쪽으로 머리통이나 뒤통수를 맞게 되면 눈물이 저절로 쏟아졌고 부푼 두피는 며칠씩 가라앉지 않고 튀어나와 있었다. 간혹 선생님의 감정이 더해질 때엔 피부가 터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 대나무 잣대는 그 생김 자체로 속에 `이중잣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납작한 부분으로 맞는 아이들은 `납작파` 뾰족한 부분으로 얻어터지는 아이들은 `모서리파`였다. 이상하게도 `납작파`에는 학업우수생과 `범생`들이 많았고 `모서리파`에는 학습지진아들과 말썽꾸러기들이 많았다. 유유상종이라 `납작파`는 `납작파` 아이들끼리 `모서리파`는 `모서리파` 아이들끼리 어울렸다. `납작파`는 `모서리파` 아이들이 잣대의 모서리로 호되게 맞고 온몸을 뒤틀며 아파 뒹굴면 쌤통이라며 환호했고, `모서리파` 아이들 역시 그랬다. 하지만 같은 `파` 내에서는 서로 보살피며 실수를 해도 관대하게 용서하고 도왔다. `모서리파`와 `납작파`는 이렇게 서서히 멀어졌고 같이 놀지도 않게 됐다. 모두 우리가 잘 되라고 가르친 사랑의 매였지만, 저승사자선생님이 들고 있던 대나무 잣대가 결국 파벌을 만들었던 것이다.

초기 국가기능을 서적에서 찾아보면 `외적의 침입을 막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이런 문구가 나온다. 국가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필수 항목이 바로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들이 쓸 도량형을 통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는 거야 국가로서 당연한 기능이고 또한 도량형을 통일하는 일 또한 아주 중요한 일 이었을 게다. 만약 고무줄처럼 죽죽 늘어나는 자로 물건의 길이를 잰다면 국가 전체에 아마도 큰 혼란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의 깊은 뜻은 무엇을 측정하고 판단하는 데는 획일적이고 보편타당해야 하며, 세상의 이치를 판단하고 측정하며 이해하는 것과 국가통치에서도 같은 잣대를 적용하라는 가르침이다. 선생님이 내리치는 대나무 잣대의 방향에 따라 파벌이 만들어 졌듯이 적용하는 잣대가 일정치 않다면 수많은 부작용과 혼란이 올 수 있게 됐으니 모든 척도는 같은 잣대로 재야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새 대통령을 맞아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있다. 그간 보수 측 대통령에서 진보대통령이 선출됐다. 새로운 대통령은 내각을 구성하며 흔들리던 국가기강을 새우기에 바쁘다. 이때 국무위원으로 지명 받은 이들의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인사 청문회에서 나온 그들의 허물들이 국무위원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지 확실히 검증해야 한다. 이때 적용되는 잣대는 정치 이념적 잣대를 적용해 용서되거나 허용되어선 안 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하면 불륜`처럼 적용하거나 남의 티끌을 탓하며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편협하고 편향된 성향을 보여서도 안 된다. 만약 이런 기울어진 `이중잣대`로 국무위원을 기용하는데 사용한다면 촛불의 거룩한 의미는 사라지고 또 다시 대한민국은 어두운 터널로 빠져들게 된다. 국민들 역시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휩쓸리거나 허술하고 느슨하게 검증을 허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편저편, 보수 진보를 떠나 올곧은 잣대를 적용해 철저하고 확실한 인사청문회가 돼야 나라기강이 살아난다. 강명식 푸른요양병원장·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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