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상조라는 말은 듣기에 착잡하다. 당위성과 필요성은 인정하되 실행은 나중으로 미루자는 뜻이다. `미루고 싶다`는 느끼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 계획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그 일이 정말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조건이 무르익는 때를 기다려야지, 섣불리 밀어붙였다가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그 실패의 충격이 재기의 기회마저 앗아갈 수 있다고 염려한다. 이 말은 옳다. 문제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 즉 사실은 그 계획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가끔 전자의 흉내를 내며 우리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사회에는 일종의 `시기상조 리스트`가 있어 왔고 지금도 있다. 아직 한국사회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는 시기상조다, 일본문화 개방은 시기상조다, 공무원의 노동조합가입 허용은 시기상조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시기상조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는 시기상조다, 공교육 현장에서의 체벌 금지는 시기상조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은 시기상조다…`시기상조의 현대사`를 서술해볼 수 있을 정도다. 이중에는 이제 시행된 것도 있고, 아직도 `시기가 상조하여` 여전히 제자리인 것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정책들을 이미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수도 없이 많으며 놀랍게도 그 나라들은 망하지 않았다.

최근 한 성소수자 군인이 영외에서 합의하에 행한 성행위를 군 당국이 문제 삼아 결국 그는 실형을 선고받았고 법정에서 졸도했다. 이제 성소수자 군인은 군대를 가지 않아도 처벌받고 가도 처벌받는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호모포비아들은 차치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안타깝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다`라는 입장을 말하고 있으니 시기상조 리스트는 또 한 줄 늘었다. 세계최강군인 미군은 군인의 성적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법적 제재도 가하지 않으며 동성애자인 장성까지 있는데 왜 우리는 시기상조인가. 동성애자들에게도 국민성이 있어서 우월한 미국은 돼도 열등한 한국인은 안 되는 것인가.

시기상조가 아니라 만시지탄이다. 서구사회가 동성애는 `질환`이 아니며 따라서 `치료`의 대상도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에 도달한 것은 1970년대다.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주어진 정체성`이므로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세계의 사회적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대한민국의 몇몇 목회자들은 동성애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며 월급을 받아간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그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누구도 감히 하기 힘든 사랑이어야 한다. 그러니 성소수자들을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반했다.

지난 대선 토론 때 논란이 된 동성 결혼 합법화 문제 역시 그렇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에서 제작한 자료집에 따르면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나라는 영국 미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포함 23개국이며, 시민 결합 제도를 통해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까지 포함하면 총 44개국이 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은 왜 이 같은 관용과 성숙의 지표에서는 44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나라여야 할까.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물질적 진보 말고 정신적 진보의 수준을 보여주는 거의 모든 지표에서 세계 순위 하위권에 속한다. 그 처지를 벗어나는 일도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어슐러 르 귄의 유명한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전반부는 미래 세계의 어느 작은 나라 `오멜라스`가 얼마나 풍요로운 나라인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돼 있다. 그러나 그 전반부는 후반부의 끔찍한 진실과 대조 효과를 만들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오멜라스의 어느 지하실에는 아무 죄도 없는 한 아이가 짐승처럼 묶인 채 굶주림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왜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 아이 하나가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오멜라스의 그 풍요로운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비열한 사회적 계약을 알고도 우리는 계속 이 오멜라스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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