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가면, 어느 무덤 앞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독특한 비석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조선 중엽 청백리(淸白吏) 박수량(朴守良·1491-1554)의 그 유명한 `백비(白碑)`다. 그는 장성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 38년간의 벼슬살이에 관찰사 판서 등을 지냈으며 곧은 성품에다 특히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집 한 칸을 제대로 지니지 못했으며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어 나라의 도움을 받을 정도였다. 그의 부음을 접한 명종은 `많은 학덕을 지녔으면서도 겉으로는 항상 부족한 것처럼 하였으며 집에는 한 줌의 곡식도 없었으니 더욱 그가 아깝고 애석하다`하였으며, 서해안 바닷가의 돌을 골라 비(碑)를 하사하며 `비에다 새삼스럽게 청백의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백에 누가 될지 모른다`며 그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해 이름을 백비로 부르게 하였다. 전국에 널린 조선조 인물들의 묘 앞 신도비며 비석에 장황하게 쓰인 공덕이나 벼슬 과시와 비교해 볼 때 백비는 그 얼마나 참신한 모습인가.

조선조 관리들의 공직윤리는 청렴과 근검을 중시하는 청백리정신이었으며 이는 학행과 의리로 대변되는 선비정신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이었다. 청백리는 의정부와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해당 인물을 천거한 뒤 임금의 재가를 얻어 공식적으로 인정한 공직자를 말하며, 이 호칭을 받는 것은 개인 나아가 집안의 크나큰 영예이었고 또한 그 후손들에게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조 오백년 역사상 단 218명만이 그 영예를 얻었고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는 24대 헌종 이후로는 한 사람도 없었다. 청백리의 표상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 세종조 맹사성이며 같은 시절 한글창제에 극력 반대하여 오늘날도 욕을 먹는 최만리도 당대의 이름난 청백리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청백리라는 제도적인 존재는 당시 부패했거나 비리를 일삼는 관리 혹은 탐관오리가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관련해선 중국 명(明) 태조 주원장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하층 평민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주원장은 탐관오리라면 치를 떨었다. 그들에겐 기존의 형벌로는 부족하다 하여 무시무시한 혹형을 만드니 그 중 하나가 이름하여 박피실초(剝皮實草). 탐관오리의 살가죽을 통째로 벗겨서 그 가죽 안에 풀을 채워 박제를 만들고는 관청 입구나 집무실 자리 옆에 세워두게 하였다. 후임자가 이를 보고 경계하라는 뜻이었다. 수만 명의 박제된 인간 허수아비가 전국의 관청 안팎을 밤낮으로 지켰다니 그 기괴한 살풍경을 잠깐 상상해 보라. 헌데 그 형벌의 효과는 과연 어땠을까? 주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아침에 탐관오리를 가득 죽였는데 저녁에 또 다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그들은 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다시 일을 저지르는가?`

조선의 경우, 바로 주원장 때 만들어진 대명률(大明律)을 근간으로 한 형법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처해 나갔지만 역시 부정부패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세도정치 이후의 행태들은 워낙 잘 알려져 있으니 이만 줄이기로 한다.

조선을 지배하던 성리학은 학문 자체가 개인의 수양이나 윤리 도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허나 그토록 배움이나 예의와 덕행을 중시하고 백성을 향해 군자의 덕치를 꿈꾸던 사람들이 어찌 그런 모습이 되었던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던 그 끈질긴 인품교육은 어떤 결말에 이르렀던가.

이 의문은 왕조시대가 아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왜 우리는 대개가 털면 먼지가 나는 걸까? 그리고 또 구석구석에 왜 그리도 먼지가 많은 걸까?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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