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동네 아이들과 칡뿌리를 캐러 다닌 적이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톱과 삽을 들고 산으로 칡을 찾아 헤맸었다. 조금이라도 더 큰 것을 캐 보려고 돌아다니다 다치거나 옷을 찢어 먹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팔뚝 만한 칡뿌리라도 발견하면 열심히 캐 동네 아이들과 나눠 먹거나 집에 가져오곤 했었다. 그러다 한 번은 지름이 약 30㎝에 가까운 칡을 발견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신나서 열심히 땅을 팠지만 아이들 힘으론 역부족인게 사실이었다. 결국 몇 시간을 들여 파다 포기하고 말았다. 아쉬운 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만 잘라 내고 또 잘라 낸 부분을 다시 동네 아이들 수 만큼 잘라서 나눠 가졌던 기억이 있다. 며칠 후 그 칡을 다시 공략하기 위해서 숲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다.

늦게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렇게 큰 칡은 좋은 약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 때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포기하지 말고 몇 날을 걸쳐서 라도 캘 걸`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왜냐하면 당시 돌아가시기 전, 많이 아프셨던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던 터라 `캐서 드렸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후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칡뿌리! 참 맛도 좋고, 단물도 많고, 몸에도 좋다. 하지만 캐는 수고가 상당하다. 아마도 어릴 적 캐지 못했던 지름 30㎝의 칡뿌리는 어림잡아 그 크기가 3m는 됐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니 그것을 다 캐내기 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야 했을까. 생각만 해도 땀이 난다. 지금쯤 그 칡뿌리는 아무도 모르는 숲 속에서 더 거대하게 자라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해 우리나라는 칡뿌리를 만났다. 처음엔 작아 보이던 녀석이 캐낼수록 그 줄기와 뿌리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온 국민이 지켜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이유는 그 칡뿌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속에서 토양까지 썩게 만들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3월 거대하게만 보였던 칡뿌리가 뽑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아니올시다`이다. 4월이 되자 자신들의 정치신념을 설파하며 유권자들을 설득해야 할 그들(?)은 자기들은 칡뿌리가 아니라는 듯이 상대 후보들 흠집 내는 말 잔치를 벌이며 거짓말을 일삼고 있었다. `아니면 말고`식의 책임감 없는 그 모습과 그런 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아직도 캐내어야 할 뿌리가 남아있음을 실감한다.

희대의 살인마 아돌프 히틀러. 600만 유태인들을 학살한 전범이다. 그리고 그를 추종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최근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에 맞물려 다시금 조명되는 인물이 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바로 그다. 유태인 학살을 집행한 가장 중요한 집행자이자 공무원이었던 그는 종전 이후 잠적해 다른 나라로 피신해 살다가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돼 `뉘른베르크 재판`이라는 세기의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재판에서 상당히 상투적인 말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관용적 표현, 선전문구, 고전인용문을 자기 말처럼 사용했다. 기억력은 매우 나빴지만 그런 표현 만큼은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사용했던 것이다. 간혹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 조차 상투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곤 했다. 이에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를 일컬어 `자기만의 언어규칙에 갇혀 생각하기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의 말하는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 즉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돼 있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현실자체를 막는 말의 벽에 에워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카톨릭 교회 교리서 36 항에서 교회는 `인간이 타고난 이성의 빛을 통해서 피조물로부터 출발해 만물의 근원이며 목적이신 하느님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쁨의 시기를 살고 있는 요즘 `그분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정말로 그 부활이 기쁜가`하는 자문을 가져본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해마다 돌아오는 성탄과 부활에 대해 깊은 인식과 성찰, 즉 생각함 없이 입으로만 `기쁘다`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본다. 또한 `생각함과 그에 따른 행동함(공감, 소통, 성찰, 용기 내어 말함)`을 없이 하는 것이 눈이 띄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평범한 악`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인식이 참된 기쁨이 되기 위해서, 말함과 사고함을 막는 평범한 악을 이겨내기 위해서, 아직 남아 있는 이 땅의 썩은 칡뿌리를 캐내기 위해서,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수고스럽더라고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말며 살아가자. 이진욱 천주교 대전교구 이주사회부 신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