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

나에게는 여러 십 년 전전날의

저 빨치산 아낙 같은 누님이 있어

전설처럼 멀고 먼 산골 마을로

달비 끊어 오겠다며 길 떠난 지 오래

여태도 소식 없어 낮달처럼 희미해진

누님의 이름은 은희였다

(울다가 웃음 반 울음 그친 얼굴의…)

하늘

하늘은 시 원고 청탁서다

마감 날도 없다

죽을 때까지 써도

안 써도

원고료만큼은 얼마든 노다지다

서정춘 시인은 전남 순천에서 출생해 남도적 기질을 다분히 지닌다. 그는 원래부터 시를 아주 짧게 쓰기로 소문이 났는데. 해서 최근 보내온 그의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에 맨 처음과 끝에 수록된 두 편을 소개한다. 시인은 자고로 재주가 많아서 그림 잘 그리고 글씨 잘 쓰고 또 노래 잘 하고 춤도 잘 추는데. 거기에 책도 잘 만드는지. 책갈피 속 짧은 사신에는 이렇게 적어 왔다. "시는 아니고 수공예 시집을 보여드립니다. 늘 고맙고 미안합니다. 서정춘 절". 그런데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서정춘도 대전일보와 큰 인연이 있기는 있는데. 그가 수년 전 대전일보가 주관했던 제3회 박용래문학상을 탔으니 말이다.

말이 죽 솥처럼 끓어 넘치는 이 시대에 그는 극도로 말을 아끼고 시를 쓰는지라. 그의 시 한편은 대략 10여 행 이족 저쪽이고. 시집에 수록된 시의 숫자도 대략 30편 안팎일 뿐. 그런데 그가 늘 말을 아끼는 것은 아니라서, 모처럼 곡차 한잔을 자시면 구성진 목소리에 판소리 발장단이 신명나고. 손장단에 다탁의 찻잔들도 함께 박수를 치면서 여기저기로 몰려다니는 날도 더러 있기는 하였다. 그 뭣이더라. `부용산`인가 뭣인가 하는 그런 노래들을 아주 썩 잘 부르곤 하였다. 김완하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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