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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영의 역사산책] 서울에 온 관운장(關雲長)

2017-05-18기사 편집 2017-05-18 11: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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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국지연의'가 낳은 영웅 관우(關羽) 곧 관운장. 긴 수염과 적토마 그리고 청룡언월도의 주인공. 무엇보다 주군을 향한 충성심과 의리의 사나이. 그가 시대를 거치며 관왕(關王)이 되고 또 무신(武神)이 되어 조선을 찾은 건 임진왜란 때였다. 당시 참전 중이던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남대문 인근 저택에서 치료하다 완치되자 평소 관우의 열렬한 숭배자인 그는 관우의 혼령이 도왔다고 여기고 저택 안에 사당을 세웠다. 여기에 조선 측의 지원이 더해져 확장 완공되니 이것이 남관왕묘(南關王廟) 즉 남묘(南廟)이고 서울 최초의 관우 사당이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물러간 것은 관우의 덕분이라 하여 명나라 황제 신종이 자금 4000냥을 보내와 지은 것이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동묘(東廟). 선조 34년 1601년의 일이다. 숙종 시절부터 대대로 임금이 참배하는 국가적인 성지가 되었으며 지금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말, 관운장은 서울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 표적이 된 명성황후는 하급무관의 등에 업혀 가까스로 궁을 벗어나 먼 친척 충주목사 민응식의 본가, 경기도 이천의 장호원에 숨어 있게 된다. 그러다가 이 집을 드나들던 어느 무당을 만나게 되고 8월이면 환궁한다는 놀라운 점괘를 받는다. 거기에다 그 무당은 불안에 싸인 황후를 위로하고 말벗이 되어주었다. 그러던 차 정세는 급변하여 명성황후는 그 무당의 예언대로 정확히 8월에 궁으로 돌아오게 되며 이어 황후는 고종을 통해 그 무당에게 파격적으로 진령군(眞靈君)이라는 작호를 내리고 진령군은 궁중에 무상출입하게 되는 특혜를 누린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며 관우의 혼령을 모시는 사당을 원했고 고종부부는 두말없이 명륜동 땅에 사당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북묘(北廟). 1883년 고종 20년의 일이다.

북묘에 들어앉은 진령군은 왕실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점차 권력의 본거지가 된다. 벼슬을 바라는 사람은 북묘를 찾아 천금을 바쳤고 그녀의 말 한마디로 벼슬을 얻었다. 고관대작들도 북묘를 찾아 그녀의 양자가 되고 혹은 의남매를 맺었다. 그야말로 진령군은 비선실세였고 국정을 농단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터지자 명성황후는 북묘로 피신했고 이어 고종도 고집 끝에 북묘로 들어갔다. 이후 북묘의 덕으로 살았다고 생각한 고종부부는 다음해 북묘를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황후는 진령군의 말에 따라 궁중에 무당들을 불러들였고 전국의 사당이나 명산대천에 재물을 바쳐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 금강산 1만2000봉 각 봉우리마다 쌀 한 섬, 돈 천 냥, 베 한 필씩 바치는 일도 있었다. 당연히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들의 삶은 더더욱 피폐해졌다. 고종 30년 1893년 사간원 정언 안효제의 상소를 보자. '우리가 관우를 숭배해 제사지내는 것은 그 충성심과 의리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지 복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디서 요사스런 여우가 들어와 황당하고 허망한 말로 거짓과 사설을 늘어놓으며, 또한 잇속만 차리는 염치없는 자들이 몰려들어 복을 구하는가?' 1895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변을 당하고 진령군도 이듬해 죽었다. 북묘는 결국 일제치하 1913년에 헐리고 동묘에 병합되었다.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조선나들이를 했던 관운장은 참으로 면목 없게 되고 말았다. 게다가 요즘도 저간의 정국에 빗대어 북묘의 존재가 세간에 오르내리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5월 초 긴 연휴에 찾은 동묘는 하필 공사 중이라 그를 뵐 수가 없었고 그 주위 동묘 구제시장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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